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필자가 속했던 6학년 2반 학생 60~70명 중 1/3인 2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일본식으로 성을 바꿀 정도였다. 당시 창씨를 거부할 경우 중학교, 특히 경기중학 등 공립학교에 입학할 때 문제가 됐으며, 또 취직할 때 온갖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물론 필자는 아버님의 의지로 창씨를 하지 않고 버티다가 해방을 맞으니 어린 마음에도 떳떳했으며, 친구들 사이에서도 우쭐댈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일 같지만, 당시 창씨를 한 경우와 하지 않은 경우의 차이는 바로 일본에 얼마나 저항했느냐, 순응하고 협조했느냐를 판가름하는 척도로 봐도 크게 하자가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조상 전래의 고유한 성씨를 바꾼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뽑아내는 격이니 어찌 가벼이 넘길 수 있었겠는가? --- 「국민학교 시절, 일제 말기 어수선했던 일들을 회고하다」 중에서
당시 국가 전시비상체제하에서 군 장병 확보가 필수적인 만큼, 정부는 군 의무입대 연령을 18세로 정해 시행하고 있었다. 그때 필자 나이 꼭 18세로 아직 어린 중학생이었으나 군대에 가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자 도리라 생각했다. 이런 취지에 부합하듯 국방 당국은 국민방위군을 창설했고, 필자도 1951년 1월 말경 경남 삼천포 지역 국민방위대에 자진 입대했다. 그곳은 군에서 필요한 인력인 18세에서 45세까지의 청장년을 미리 확보하기 위한 곳으로, 필자는 삼천포중학교 교사를 빌려 책상을 치운 교실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모포를 덮고 자야 하는 일종의 대기 수용소에서 머물러야 했다. 기껏해야 운동장에서 목총으로 제식훈련을 받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 이상 훈련을 시킬 만한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군복과 군화 지급은 물론 소총 사격훈련도 받을 수 없었으니, 군대가 아니라 마치 장병 수용소 같았다. --- 「“우리는 피 끓는 장교다!”, 국민방위군 사관생도 시절을 회고하다」 중에서
잠시 심신을 가다듬고 곰곰이 생각하니 결국 필자의 본분인 중학생으로 돌아가 공부하여 앞날을 기약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침 그 무렵 휴전회담을 진행하는 등 전쟁도 막바지 국면의 소강상태였다. 또한 병역 의무도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면 졸업할 때까지 보류되는 등 국가적인 위급 상황이 많이 완화되고 있었다. 때마침 양정중학교 대구 본교에 이어 피난분교가 부산 초량동 산비탈에 천막 2개를 치고 문을 연 상태였다. 그러나 비교적 학생 수가 많은 저학년 위주로 수업을 겨우 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대학 입학을 앞둔 우리 졸업반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가르칠 만한 선생님도, 수업을 받을 학생들도 별로 없었으니 각자 알아서 할 수밖에. 어찌할 수 없는 일, 불과 6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학입시를 뒤늦게 독학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 「6ㆍ25 전쟁 중, 부산에서 대학에 입학하다」 중에서
경성제국대학 등 일제강점기 대학들을 계승한 문리과대학, 의과대학을 비롯해 법과대학, 상과대학, 공과대학, 사범대학 등은 소위 명성과 역사가 있고 학생 수도 많았다. 그러한 주류 대학과 약학대학, 치과대학, 수의과대학, 농과대학, 음악대학, 미술대학 등 단과형이며 학생 수도 적은 비주류 대학 간 견해가 달랐던 것이다. 여기에 전통성, 역사성, 우월감의 차이는 그 거리감을 더 크게 했으며,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각 단과대학별로 각기 다른 고유한 배지를 갖고 있었다. 결국 종합대학인 서울대학교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로고는 없고, 각자의 특성만 내세운 로고만 있었다. ‘University(종합대학)’가 ‘College(단과대학)’로 전락한 셈이며, 이는 해방 직후 1946년의 국립대학안(국대안) 반대 운동 여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구태의연하고 한심한 작태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수의과대학 학생대표인 박중수 회장은 비주류 학부를 결속시키는 한편, 주류 학부를 설득하는 데 역량을 발휘했다. 그 결과 1955년 12개 단과대학 대표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에서 ‘서울대학교 교표 통일안’을 발의했으며, 표결 결과 다수의 찬성으로 현재 서울대 로고를 하나로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
--- 「학도호국단(학생회) 활동, 참여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