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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 의병장 면암 최익현의 유배 여행기, 면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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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 의병장 면암 최익현의 유배 여행기, 면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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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8년 0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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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19.29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6.7만자, 약 3.2만 단어, A4 약 105쪽?
ISBN13 9791163471110

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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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益鉉(1834~1907)은 조선왕조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의병장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초명은 奇男, 字는 贊謙, 아호는 勉菴이다. 김기현과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노론 화서학파의 지도자이자 위정척사파의 중심 인물이었고,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抱川郡 嘉范里에서 崔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初名을 奇男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익현으로 고쳤다. 최익현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華西 李恒老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동부승지, 참의, 돈녕부의 도정 등을 역임했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74년 흥선대원군을 공격하여 실각시켰다. 그 뒤 의정부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정인홍,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결사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開港五不可의 丙子斥和疏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늑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3개월 뒤의 발병(풍증)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1928년 시호 없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면암 최익현은, 14세 때 경기도 楊根郡 蘗溪에 은퇴한 노론성리학의 거두 李恒老의 문하에서 擊蒙要訣, 大學章句, 論語集註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그는 이항로의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로 인정되었고, 나중에는 송시열과 송준길-권상하-한원진, 이간-이항로를 잇는 노론의 정통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스승인 화서 이항로로부터 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明經科 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孔孟의 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화서는 최익현에게 勉菴이란 호를 지어 주고, 洛敬?直이란 글을 주면서 항상 학문을 권면하였다. 이로부터 최익현은 이항로의 학문을 전승받아 위정척사의 救國扶道의 의리를 구현시키고자 온 생애를 바쳤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인 유인석, 김평묵 등을 만나게 된다.
1855년(철종 6년) 2월에 春塘臺에서 열린 講經에서 1등, 바로 생원시나 진사시를 거치지 않고도, 그 해의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철종 재위 중인 1855년(철종 6) 과거에 급제하여 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順康園守奉官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근무했다. 成均館典籍, 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 吏曺正郞, 新昌縣監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강직과 善政으로 칭송되었다. 地方官과 言官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그는 언관 벼슬에 주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조선조 사림의 최대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하다가 눈밖에 나는가 하면,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세도 가문 축출에서 벗어나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북인 등도 등용하자, 그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된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여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 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사헌부장령을 거쳐 공조참의, 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8년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중략-
최익현은 긴 침묵을 깨고 고종 32년(1895) 6월 26일 다시 상소를 올렸다. 62세의 노령이었다. “역적을 토벌하고 의복제도를 복구하기를 주청하는 상소(請討逆復衣制疏)”라는 제목대로 그것은 박영효ㆍ서광범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를 처단하고, 그들이 좁은 소매에 검은 옷으로 변경한 의복제도를 원래대로 되돌리자는 상소였다.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시국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같은 해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1월에 단발령에 내려진 것이다. 최익현은 포천에서 단발령에 반대해 궐기하려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때부터 1904년까지 고종은 호조판서ㆍ경기도 관찰사ㆍ의정부 贊政ㆍ궁내부 특진관 등의 벼슬을 내리면서 출사를 권유했지만, 최익현은 모두 사직했다. 그러면서 나라의 실질적인 멸망과 함께 최익현은 마지막 상소와 투쟁에 나섰다.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은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했다. 11월 3일과 14일 최익현은 마지막 상소인 請討五賊疏를 올렸다. 거기서 그는 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그 체결에 참여한 박제순ㆍ이완용ㆍ이근택ㆍ이지용ㆍ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상소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한계를 절감한 최익현은 투쟁의 방식을 바꿨다. 73세의 최고령 의병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06년 2월 그는 家廟에 하직 인사를 드린 뒤, 호남으로 내려가 자신의 제자이자 전 낙안군수 林秉瓚(1851~1916)과 함께,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했다. 4백 명 정도의 최익현 의병은 정읍ㆍ순창ㆍ곡성 등을 돌며 시위했지만 병력과 무기 등 모든 측면에서의 열세로 인해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최익현은 1906년 6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7월 8일 ‘쓰시마(對馬島)’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그는 단식으로 저항했고, 결국 11월 17일에 순국했다. 실로 한국 근대사의 격동을 모두 겪은, 73년의 길고도 波瀾 많은 流配의 생애였다.
勉菴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고, 유배되어 단식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그 기록을 읽는 것만으로도 피눈물이 나는 심정을 갖게 한다. 면암의 시대는 물론이며 어느 시대라도, 면암과 같은 삶을 살아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한 상황에서 大衆의 절대다수는, 그저 自身을 爲始한 家庭이나 家門쯤의 작은 울타리를 유지하기 위해 살아낼 따름이기 때문이다. 실상 그러함이야말로 人之常情이며, 그러한 상황은 21세기 ‘지금 여기’에서도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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