使和記略의 著者 朴泳孝(1861~1939)는, 子純, 春皐, 朴無量, 玄玄居士,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 등으로 불리는 韓末의 정치가다. 급진개화파로서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추구했다.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방어하고자 했다.
박영효는, 1861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潘南 朴氏이다. 그의 부친은 진사 출신인 朴元陽이며, 초명은 無量이었다. 12세 때 朴珪壽의 천거로 철종의 딸 永惠翁主와 결혼하여 駙馬가 되고, 錦陵尉의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영혜옹주가 결혼 석달이 채 되지못해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小室을 맞아들였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1879년 惠民署 제조, 1881년 義禁府 判義禁府事에 임명되었다.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82년 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박규수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劉大致를 중심으로 金玉均, 洪英植, 徐光範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했다. 유교사상을 부정하고 평등과 민권사상 등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급진적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1882년(고종 19) 壬午軍亂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는 修信使 대표에 임명되어 민영익, 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시도했다. 도로를 관장하는 治道局,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警巡局, 신문발행을 담당하는 博文局 등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閔台鎬 등 민씨 세력의 견제를 받았으며, 민씨 척족과 金炳始, 金炳國 중심의 수구파 세력이 집권하자, 그와 개화파는 정치적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이에 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1884년 10월 17일 郵政局 청사의 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내각이 조직될 때, 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渡美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박영효는 일본의 힘을 빌어 정계에 복귀하였지만 이후 일본에 역이용 되었다.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18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1898년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 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7년 약 13년간의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귀국, 李完用 내각의 宮內部大臣에 임명되었다가,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侯爵을 받았으며, 1918년에 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저서에 使和記略(1882)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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