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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당신까지의 여행

나로부터 당신까지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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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 top20 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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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9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392g | 140*200*20mm
ISBN13 9791158770624
ISBN10 11587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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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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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저 세상에 반응한 것일 뿐이야. 다른 건 없어. 너는 너의 의지로 춤을 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음악에 반응한 거야. 너는 너의 의지로 크레페를 먹는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배고픔에 반응한 거야. 너는 모든 순간 너의 의지대로 결정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그날 아침 눈을 떴을 때의 구린 날씨, 그날따라 기분이 안 좋았던 직장 상사, 그가 서류 파일을 던진 순간 유리창 너머로 날아가는 비행기… 그날 신은 너에게 당장 그 엿 같은 도시를 떠나라고 메시지를 보낸 거야. 거기서 네가 달리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있었겠니. 너는 네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그러니 스스로를 탓하지 마.”

의도치 않게 들은 장황한 연설에 하마터면 손뼉을 칠 뻔했다. 남자의 투명한 갈색 눈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무엇을 택하든 그것이 최선이라니. 그렇다면 나 또한 나의 최선의 선택들로 여기까지 온 건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두가 그런 것인가. 내가 그려온 삶의 궤적이 모든 순간들의 최선이라 생각하면 적어도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사라진다. 그러나 앞으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면 도무지 허무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운 사이 남자와 여자는 자리를 떴다. 깨끗하게 비운 에스프레소잔을 보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게 한낮의 환영처럼 느껴졌다. 여행자에게 신은 매일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더니, 그들은 오늘 내게 찾아온 신이었나. 가게 밖으로 나오니 더위가 식었는데도 정신이 아찔하다. 남자가 남긴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붕붕 떠다닌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게 최선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게 최선이다. 오늘 내가 신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낳게 될까. 다른 건 모르겠고 오늘은 나도 내 얘기를 귀담아 들어줄 완전한 타인 하나 만났으면 좋겠다. --- p.36~37

블랙커피만 마시던 우리에게도 가끔은 별미가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요정이 긴 여행 동안 틈틈이 한국인들로부터 받아 모은 ‘맥모골’이었습니다. 맥심 모카 골드. 전형적인 한국식 커피믹스 말이에요. 워낙 귀한 별미인지라 내주는 방식 또한 남달랐습니다. 요정은 커피믹스마다 그날의 운세 비슷한 것을 적어놓고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뽑게 했습니다. 커피믹스에 적힌 문구에 따라 어떤 날은 왠지 더 행복한 날, 어떤 날은 왠지 집에 가고 싶은 날이 되기도 하였죠. 특별한 문장도, 대단한 맛도 아니었지만 그가 건네는 커피믹스는 일종의 심리적 허기를 달래주었습니다. 참 이상하죠. 직장인들의 애환을 상징하는 커피믹스가 여행 중에는 이렇게 달콤한 위안을 주다니. 우리의 작은 일상을 지키는 힘은 아마도 누군가의 소소한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아침 요정이 나눠주는 크고 작은 마음들을 먹으며 저는 어떤 공동체 생활을 꿈꿨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언젠가는 이렇게 하늘 높고 물 맑은 곳에서 따뜻한 사람들과 작은 마음을 나누며 살고 싶다는. 넘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게. 다만 약간의 섬세함으로 서로의 오돌토돌한 부분들을 돌보면서.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장소는 라다크였으면 좋겠습니다. 소들의 언덕이 아닌 프랜차이즈들의 언덕에서 지내며 커피믹스보다 바닐라 라떼를 더 자주 마시는 요즘 저는 그곳이 많이 그립나 봅니다. --- p.188~189

하필이면 그날 숙소에 전기가 나간 건 재앙의 전조였을까, 머리에 헤드랜턴을 끼고 요리를 하던 나는 간을 보고 도로 뱉을 수밖에 없었다. 간장이라고 생각했던 소스는 알고보니 간장과 비슷한 중국의 다른 향신료였다. 긴급처치한답시고 물을 더 넣고 설탕을 듬뿍 넣었는데, 오야꼬동은 결코 오야꼬동이라고 할 수 없는 맛으로 변해버렸다. 다급하게 전직 요리사였던 여행자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 그는 맛을 보더니 내가 만든 국물을 싱크대에 버리고 새로 간을 하기 시작했다. 찬장의 이런저런 가루들을 넣고도 답이 안 나왔는지 급기야 배낭에서 하얀 가루를 꺼내어 살살 쏟아부었다. 그것은 미림이었다. 그는 미림이 자기 요리의 비결이라고 했다. 다행히 그의 심폐소생술로 죽음의 문턱 앞에 섰던 오야꼬동은 다시 살아났다. 찜닭이라는 새로 운 몸으로.

충은 그때의 오야꼬동을 아직까지 종종 얘기한다. 그 오야꼬동 참- 맛있었다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오야꼬동은 정말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충은 아마 그때의 내 허둥거림과, 나를 보는 식구들의 웃음과 격려, 그리고 서로에게 계란을 양보하며 음식을 나누던 그 순간이 맛있었던 게 아닐까. 이제껏 한 번도 혼자 힘으로 오야꼬동을 완성하지 못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야꼬동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요리, 혼자 먹어서는 맛이 안 나는 요리라고. 그러니 나의 오야꼬동 레시피는 영원히 미완으로 남을 것이다. 마지막 한 수는 언젠가 당신이 채워주기를 바란다.
--- p.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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