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한 종교적 공동체 내에는 특정한 경전해석의 전통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텍스트로서의 독특성을 존중한다고 해서 성서가 종교인의 독점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서구 문화에서 성서는 다양한 학문, 문학, 예술 등에 녹아들어 이미 문화적 요소가 되었습니다. 성서 또한 여러 시대와 상황에 직면하면서 시대적 정신을 담아내거나 일정한 사상과 정치적인 행동을 표현하는 매개역할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할 여러 철학적 바울 해석을 기독교의 옹호나 변증 또는 호 교론적 목적에서 사용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거의 무신론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 변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굳이 기독교와 관련하여 말한다면 그들은 기독교 변호의 차원보다 오히려 기독교 비판의 차원에서 바울과 그 의 텍스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적 사유가 기독교 친화적이냐의 문제를 넘어서 적어도 서구인들에게 성서는 공적인 고전 텍스트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했으면 합니다. 철학을 비롯하여 학문과 예술을 호교론적으로 너무 쉽게 이용하는 천박한 목적과는 다른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본서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다뤄지기보다 사회적 층위에서 다뤄지기를 기대합니다.
_“프롤로그” 중에서
현대철학자들이 바울을 그들의 철학적 목적을 위해 하나의 사례로 사용할 때 그들은 기존의 바울에 대한 해석을 넘어서는 새로운 통찰을 접목합니다. 신학 분야에서는 이미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역사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바울을 매개로 자신들의 학문적 주제를 펼쳐가는 방식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주제와 관련이 깊습니다. 곧 제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정치적 바울을 유대교, 가톨릭 기독교, 개신교의 관점에서 각각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바울에 대한 이러한 학문적 관심을 현대철학에서의 ‘바울적 계기’라고 합니다
_1장 “현대철학의 바울적 계기와 그 의미” 중에서
니체가 신 대신 인간에게서 존재의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면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계 내에서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 또는 그 연관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 장에서는 니체와 하이데거 두 사람이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위해 바울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니체는 기독교 비판의 대표적인 대상으로 바울과 그의 사상을 지정하고 있으며, 그에 반해 하이데거는 바울을 자신의 현상학을 위해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바울이 제도적 기독교를 강화하기 위해 예수를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반면 하이데거는 기독교적 종교적 삶의 현상학에 대한 진술을 전개합니다.
_2장 “종교 비판과 종교 현상 사이” 중에서
발터 벤야민은 낙관적 진보주의 역사관 또는 실증주의적 진보주의에 맞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역사를 고찰한다는 점에서 일면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을 닮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니체의 귀족주의 역사 이해와는 달리 억압받는 자를 해방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의 이러한 혁명적 주체에 대한 인식은 메 시아주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의 사상은 보통 독일 낭만주의, 마르크스주의, 메시아주의 등의 영향을 받았고 이들을 독특하게 조합하면서 그의 특이한 역사 이해를 전개했던 것입니다. 특히 벤야민의 역사 이해는 마르크스주의의 억압받는 자의 해방적 계기에 대한 강조가 유대-기독교의 메시아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벤야민의 시간 이해는 마르크스주의나 기독교식의 직선적 시간 이해와는 결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의 시간 이해는 역사의 시간을 총체적인 시간의 덩어리로 보지 않고 파편적인 시간으로 이해함으로써 ‘과거의 억압받은 자’를 현재에서 기억하고 애도하는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 이해입니다.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의 지형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대의 독일 신학의 분위기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_3장 “중단으로서의 메시아주의” 중에서
칼 슈미트와 야콥 타우베스는 정치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공명합니다. 타우베스가 슈미트에게서 정치신학의 개념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이라는 책과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이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이 두 사람은 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내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타우베스가 권위의 초월적 근거가 없는 합법적인(노모스적) 질서를 강조하는 것과 비교해서, 슈미트는 신학적 대표의 형식으로 요청되는 권위에 의해 정치적 질서가 정 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타우베스가 유대교적 배경에서 정치 적인 것을 종교적 사회 구성(또는 그 사회적 구속력)으로 이해한다면, 슈미트는 기독교적 배경(가톨릭)에서 정치적인 것을 권위나 그것에 대한 복종이라는 권력론과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_4장 “정치적인 것과 메시아적인 것” 중에서
알랭 바디우는 반플라톤주의적 존재론을 천명했던 하이데거에 반하여 플라톤적 기조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고대나 근대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 진리, 주체의 철학적 사용을 긍정합니다. 바디우는 철학이 현실의 변혁에 기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철학자의 유토피아적 세계 구축을 긍정합니다. 우연적으로 보이는 사건이 현존의 불평등한 구조를 변혁하고 현실정치의 상투성에 도전하여 새로운 창조적인 계기를 마련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적 진리에 충실한 주체는 이러한 계기를 현실 변혁의 단 초로 활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지위를 가진 지혜로운 자들이나 부유한 자들을 폐하기 위해 어리석은 자와 가난한 자를 신이 선택했다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27-28). 바디우는 이 사도 바울을 현재에 사건이 개입하여 현실을 변혁하는 데 충실한 메시아적 투사의 형상으로 보았습니다.
_5장 “부활의 사건과 새로운 주체” 중에서
아감벤의 메시아주의는 기본적으로 유대 메시아주의적인 독법에 가깝습니다. 그는 한 축에는 벤야민의 ‘지금의 시간’에 대한 관점을 많이 수용하고 있고 또 다른 한 축에는 그노시즘(영지주의)의 시간 이해를 참조합니다. 이는 모두 억압받는 자의 형상, 즉 잔여적 주체 (남은 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연대기적 시간 이해를 넘어 사건적 시간 이해를 통해서만 억압받는 자의 혁명에 대해 논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직선적 시간 이해에는 단절을 만들어낼 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 자체에 대한 이해가 실천적 맥락과 괴리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감벤의 메시아적 시간은 기본적으로 단절적인 시간 이해를 추동하는 동시에, 남은 자 형상을 현재의 시간 안에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추구하는 개념입니다.
_6장 “메시아적 시간과 남은 자” 중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구도(도착적 이해), 바디우의 사건 철학 등을 경유하여 바울의 신학을 유물론적 틀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젝은 기독교의 유산을 변증법적 부 정성의 급진적 사례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특히 그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신의 자기 포기’(케노시스)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기독교는 신의 자기 포기를 중심에 두고 기독교의 가능성을 재사유한다는 것입니다. 지젝은 기독교가 신이라는 대타자 자체에 틈을 내어 그 내적 구조와 존재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에서 변증법적인 유물론적 사유방식의 유사성을 찾습니다. 그의 기독교 사용은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옹호라든지 그것을 구조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적 유물론의 한 단계로서의 기독교의 역사적 계기를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능동적으로 이해해보려는 접근입니다.
_7장 “유물론적 신학과 전투적 사랑” 중에서
데리다에게 정의는 법의 동기이기도 하고 정당화이기도 하지만 , 반대로 정의는 법을 초월하면서 법에 의문을 제기하고 법을 불안정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정의가 법을 초월한다는 것은 정 의가 법 바깥(법 외부)에 있다는 말인데, 이는 정의가 법에 의해 제 한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정의는 법 안에서 법을 통 해(법의 예시화를 통해) 구현되는 욕망을 피하지 않습니다. 법은 해체 가능하지만 정의는 해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체 가능한 법이 해 체 불가능한 정의를 전체로 담을 수는 없지만, 정의는 해체 가능 한 법의 형태로 구현될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정의의 양가적 특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법이 목표로 하는 것 자체가 결국 법이 배신하게 될 무엇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정의가 지향하는 관심에 대한 배신이자 정의 자체에 대한 배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데리다의 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울의 법과 정의의 관점과 연결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_8장 “법 너머의 정의” 중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동시대적인 현재적 물음과 도전에 항상 직면해 왔습니다. 역사는 특정한 공동체의 집단적인 견해와 개인의 자유로운 견해 사이에서 지속적인 긴장을 유지하며 진행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우리와 나를 항상 ‘과거’라는 현재로 이끌고 ‘현재’에서 과거를 현상합니다. 개인은 일정한 공동체에 부분으로 소속되는 형식으로 정체성을 강요받기도 하지만,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적 공동체의 권력적 폭력에 대해 자유롭게 저항하기도 합니다.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공동체 소속이라는 법적 정당화도 중요하지만 개별자의 지위에 가하는 법적 폭력성에 대한 경각심도 중요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이러한 주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서 물어야 할 질문들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금 여기서’ 살아가기 때문에 주어지는 책임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_“에필로그”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