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인문학이 한결같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거듭 묻듯이, 공부하는 학인으로서의 나는 언제나 ‘공부란 무엇인가?’를 쉼 없이 물어왔고, 이 물음의 수행 그 자체가 또 새로운 공부길을 열어내곤 하였다. 좋은 물음은 새 문을 열어내고(賢問開門), 절실한 물음은 내 삶을 문제시하기(切問近思) 때문일 것이다. 지난 세월 적지 않은 책을 쓰면서도 이 물음이 계속되었던 데에는, 역시 최고의 공부란 최고의 물음 속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_7쪽(동무론, 그 이후)
단 한 번의 실수나 환멸도 영원하다. 이것이 상처의 운명이며, 곧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최선의 참회조차 영영 돌이킬 수 없음을 증거하는 비문(碑文)일 뿐이며, 최선의 용서는 기껏 망각이거나 무기력이거나 죽음이다. 실은, 우리는 참회나 용서의 의미를 다 캐기 전에 자신의 수명을 다함으로써 그 문제 자체를 해소시켜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은, 그러므로, 우리는 참회도 용서도 할 수 없으며, 그 모든 상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채 늙어가고 죽어갈 뿐이다. 상처와, 어리석음과 더불어 죽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진실이다.
_22쪽(단 한 번의 실수나 환멸도 영원하다)
그 어떤 기억도 관념으로 휘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멸하는 역사의 실재로서 살아남은 자들을 그 기억 속으로 불러간다. 이른바 ‘기억의 순교자’는 그렇게 생겨난다.
_23쪽(기억의 순교자)
시의 본질을 은유(隱喩)에 두거나 모든 시를 서정시로 여기는 태도에는 그 나름의 이치가 있다. 은유는 닮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징후인데, 우리네 세속의 본질에 의하면 깊은 것도 슬픈 일이요, 닮은 것도 결국 그 나름대로 슬픈 노릇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간접화(매개적 모방)나 환유(換喩)로 여기는 학인들의 해석 역시 이 슬픔을 가중시킨다. 그 의도를 가로막는 삶의 잡다한 심연을 그대로 인정한 터에, 무엇이 그리도 슬픈가? 은유와 환유의 교차로에서 우왕좌왕하는 신뢰의 꼴이 슬픈가? 그대, 의도(意圖)의 집에서 외출하지 못하는 내 동무여, 그대의 신뢰는 어디에 있는가?
_103쪽(세속은, 탱자나무에서 홍매(紅梅)로 흐른다)
응답의 타자성, 그 아찔한 공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보지 못한 글은 아직 글이 아니다. 삶, 글쓰기, 그리고 그 모든 실력(實力)은 세속적 응답의 근기와 슬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 근기와 슬기를 요구하지 않는,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통일 전선 속에 편입된 글은 아직/이미 글이 아니다. 요컨대, 읽히는 글이 더 이상 글이 아닌 시대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_109쪽(내 글이 나의 타자가 되는 그 어려운 응답 속에서 내 글은 길게 돌아오는 나의 손님이 된다)
글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은 글의 문제이기 이전에 보다 중요한 뜻에서 세속이 구비하고 있는 응답의 가능성과 그 한계의 문제다. 세속과 읽히는 책의 공모는 그 응답의 가능성과 한계를 규제하고 조작함으로써 계속된다. 그리고, 글쓰기의 신뢰는 바로 이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열어주는 공간 속에서 낯설고 힘들게 건설되는 것이다. 내 글이 나의 타자가 되는 그 어려운 응답 속에서 내 글은 길게 돌아오는 나의 손님이 된다.
_109-110쪽(내 글이 나의 타자가 되는 그 어려운 응답 속에서 내 글은 길게 돌아오는 나의 손님이 된다)
당신의 불행이 내 행복이 되는 그 원환(圓環)의 헤덤빔(迷妄) 속에 세속의 본질이 있다. 나는 종종 ‘완벽하지 못한 삶!’이라고 혼자 중얼거리곤 하는데, 세속은 그처럼 한 치 앞을 짚을 수 없는 헤덤빔 속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장소다. (E. 사이드가 시사했듯이) 그러므로 세속 속의 최선은 오직 다시 시작하는 것, 다시 걷는 것 뿐이다. 최선의 단자(Monad)가 되어 이 세속의 공간을 떠돌면서 그 단자에 틈이 생기는 어느 빛나는 시간에 희망을 줄을 잇고 있을 뿐이다. 의도도 믿음도 호의도 다짐도 아니다. 언덕을 넘어서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바람이 문제다.
_117쪽(언덕을 넘어서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바람이 문제다)
세속은, 실천이 의도를 배신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로써 실천을 감싸보려고 하는 ‘그림자 던지기’와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알다시피 그림자는 던질 수가 없는데, 그것을 던지려는 바로 그 사람이 스스로 아니라고 오인하는 그 그림자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바로 그것이 현명함이지요. 그러나 세속은 그것의 만성적 불가능성으로 구성된 나태한 미만(彌滿)과 그 슬픔이랍니다.
_165쪽(그림자 던지기)
한 번도 제대로 ‘남’이 되어보지 못한 관계의 기억은 완악하고 집요하고 추접스럽다. 온갖 연줄로 얽혀든 사회 속의 우리는 ‘남’이 되지 못했으므로 ‘나’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고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부른다.
_202쪽(친구/동무, 혹은 기호의 안팎)
사소함의 재해석, 그리고 그 실천적 재배치는 연인, 혹은 친구 사이의 낭만적 자명화와 자본주의적 교환충동/물화의 오해와 폐해를 고쳐나가는 데 필수적이다. 연인, 그것은 요컨대,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다. 그것은 낭만주의적 일치라는 영원한 시대착오에 얹혀 기식한다. 나아가, 그 일치가 야누스의 얼굴처럼 품은 모순 속에서 내재화의 폭력은 피할 수 없다. 친구라면, 그것은 요컨대, ‘말이 필요없는 관계’다. 사적 의리에 기대고 추억으로 회귀하는 정서적 일치의 패거리가 된 채 설명과 재서술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관계의 덫이다.
_259쪽(문턱: 연인과 친구의 사이)
행복한 해바라기, 그 거울상(鏡像)의 나르시시즘을 알지 못한 채 해를 등지고 누웠다. 해의 부름과 시선을 한 몸에 얻는다는 착각의 삶, 그 완벽한 오인의 행복은, 해바라기의 죽음으로 돌이킬 수 없이 완성되었다. 해는, 해바라기가 해/바라기로 분해되어 땅으로 돌아가려는 지금에도, 간간이, 그리고 일없이, 피를 쏟고 그 모든 ‘바라기’들을 유혹하며 창공을 배회하지만, 그 해바라기는 오해 속에서 완벽하고 행복했던 삶을 기억의 밖으로 밀어내며 더욱 행복하게 죽어 있을 뿐이다.
_310쪽(해바라기 콤플렉스(1))
이 글은, “환상을 불식시키느라 이미 탈진한 채 세상의 문턱에서 멈춰선 사회적 약자들”이, 누군가 ‘리좀’이라고 부른 이 네트(net)의 세상, 전자 신매체의 연결접속망이라는 신세계와 어떻게 접촉/접속해가는지에 대한 약술(略述)이다. 이 경우, ‘세상의 문턱’이란 무엇이며, 그들이 과연 ‘문(門)-턱’을 넘어서서 세상 속에서 ‘생산적 초월’의 입지를 얻어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제도 환경적 변동이 있었는지, 혹은, 혹시라도, 그 문(門)은 기껏 ‘창-문(窓-門)’이라는 이름의 창(窓)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아니, 심지어 창(窓)도 아니라 ‘거울사회’의 한 단말기인 거울(鏡)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등등을 자문하는 노력이 될 것이다.
_418쪽(세상의 문(門)-턱에서 빛나는 거울(들))
세상의 문턱에 성차(性差)의 지표가 선명하게 새겨진 것도 아니고, 출세와 입신이 남자들의 전유물도 아니며, 불식시켜야 할 여자들만의 환상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은, 실상 그 내용면에서도 성차의 변별을 희석시키는 중성화의 정략이지만, 그 발화의 형식 역시 그 발신-수신의 정치사회적 코드를 숨긴 채 중성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 중성화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그 약자들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 이리가레(Luce Irigaray)의 주장처럼, 여기에서도 “문제는 이것이 일부의 여성이 선택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남성에 의해 건설된 세계 혹은 여성이 선택한 적이 없는 세계, 그러나 여성이 참아내는 세계의 필요성에 의한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리가레가 적시하는 ‘민중의 새로운 아편’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 또는 ‘평등해져 가고 있다’는 소문”이다.
_418쪽(세상의 문(門)-턱에서 빛나는 거울(들))
더 이상 책 같지 않은 책들을 붙안고 살아가는 일, 욕심이 아닌 하아얀 의욕 속에서 부실한 의도를 넘어서는 일, 부재의 사치를 가꾸며 미래적 인문의 잉여를 생성시키는 일, 그리고 산책이라는 불화 속에서 동무라는 미래적 연대를 앞당기는 일이 내 삶의 구체적인 양식과 어떻게 접속할까? 교환과 물화의 자본주의적 체계에 대한 창의적인 불화, 혹은 불화하는 생산이 겉보기에 이르는 곳은 어디일까?
_458쪽(무능의 급진성)
지는 방식, 혹은 무능의 어떤 것 속에서 인문은 오히려 타락한 현재의 공시와 세속의 통시를 고스란히, 힘없이, 그러나 미증유의 비판적 풍경으로 드러낼 것이다. 그 타락한 세속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희생양들의 속절없는 죽음과 그 무능은, 역사귀류법적 진실이 되어 그 모든 희생된 가치의 비판적 무게로써 자본주의적 유능을 내리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_461쪽(무능의 급진성)
대양(大洋) 속으로 열려 있는 배가 작은 변침(變針)만으로 그 행로와 목적지를 아득하게 바꾸는 것처럼, 각자의 일상 속에 장착된 버릇의 기계들이 작고 꾸준한 변침을 실천함으로써 가져올 작은 희망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개입─이미, 늘, 자신도 모르게 지속되고 있는 개입─의 무서움을 깨닫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부과되는 책임 때문이며, 물론 그 첫걸음은 개입의 자각에 있다. 신생이란, 오직 새로운 (상호)개입의 희망인 것이다.
_562쪽(개입의 윤리와 신생의 묘맥)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