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타자에 관한 책이다. 한 편의 시 같은,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로 시작해보자.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그냥 존재함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타자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진심으로 동의한다. 나도 나의 관심이 나에게서 타자로 옮겨갈 때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타자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순간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며, 대신 우리라는 신기한 집합이 탄생한다.--- p.7
우리는 동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평균 한국인이 하루 평균 동물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조사해보면 아마 1~5초쯤 될 것이다. 길거리의 비둘기가 ‘더러워서’ 피할 때나 모기를 잡을 때 정도 그러나 단 하루라도 동물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우리에게 동물은 물과 공기 같은 존재인 것이다. 없이 살 순 없지만,?너무 당연해서 생각도 안 해보게 되는. 그런데 물, 공기와는 달리 동물에겐 의식이 있다. 감정도 있다. 그래서 우린 물과 공기를 괴롭힐 순 없지만, 동물에겐 고통을 줄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줄 수 있다. --- p.15
비건이란 단순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비건은 동물로 만든 제품의 소비를 거부하는 사람이자 소비자운동이다. 고기는 물론, 치즈나 우유 같은 유제품, 달걀, 생선도 먹지 않으며, 음식 이외에도 가죽, 모피, 양모, 악어가죽, 상아 같은 제품도 사지 않는다. 좀 더 엄격하게는 꿀처럼 직접적인 동물성 제품은 아니지만 동물을 착취해서 얻은 제품도 거부하며, 같은 의미에서 돌고래 쇼 같은 착취 상품도 거부한다. 하지만 이중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게 음식이니, 엄격한 채식이라고 알고 있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 p.15
“왜 비건을 하게 되셨나요?”
어느 나라에서 이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해봤다(한국은 이런 설문조사를 하기엔 모집단이 너무 작다). 흔히들 비건이 되는 세 가지 이유로 동물, 환경, 건강 문제를 꼽는데, 흥미롭게도 이 세 가지 이유 중 동물 때문에 비건이 되었다는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건강과 환경이 그 뒤를 이었다. 만약 내게 물어봤다면 이렇게 답했을 것 같다. 나도 동물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비건은 결국 건강의 문제라고 말이다. 극심하게 고통받다가 처참하게 죽은 생명의 몸뚱이를 매일 입에 넣는 것. 그게 영혼을 건강하게 해줄 리 만무하다. 육식이 자연과 몸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고로, 동물 문제는 영혼의 건강, 환경 문제는 자연의 건강, 건강 문제는 신체의 건강이라고 할 수 있겠다. --- p.34
무슨 주의자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말로만 떠들어도 쉽게 탄로 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자본주의의 혜택을 한껏 받으면서 살아도 티가 안 난다. 페미니스트도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으면 이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 힘들다. 자칭 진보주의자이면서 삶은 지극히 보수적으로 사는 얼치기 좌파는 또 얼마나 많은가.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자칭 환경주의자들도 손쉽게 합리화를 한다. 에너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리낌 없이 일회용 컵에 커피를 마시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다루는 사람은 공회전을 해도 좋다고 여긴다. 자기가 주창하는 이상에 걸맞은 실천을 하지 않아도 비판받지 않으며 빠져나갈 구멍들이 있다.
비건은 그렇지 않다. 비건만큼 본인이 표방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좁은 주의자도 없다. 따라서 비건만큼 ‘ 커밍아웃’ 을 했을 때 실제 생활에 파급력이 큰 경우도 드물다. 최소한 하루에 세 번, 매끼마다 스스로 선택의 순간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직접 해보면 주위의 관심 혹은 ‘감시’ 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늘어남을 체감할 것이다. 커밍아웃을 한 동성연애자들도 매끼마다 성 정체성이 화제에 오르내리진 않는다. 최소한 연애는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암묵적인 합의라도 있는데, 음식은 누구든지 한마디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식되어 있으며, 단체 식문화가 발달한 한국은 그 폐해가 더 심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비건을 하면 도 닦는 심정이 된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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