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말거라. 설교하려는 것도 아니고, 널 슬프게 하려는 것도 아니니까. 난 단지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가슴과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 말이야. 우리가 서먹해지기 이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 무거운 짐이 되곤 하더라. 나는 꽤 오래 살았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냈기 때문에 잘 알지. --- p.26~27
그러니 우리 사이가 멀어진 건 지극히 당연한 거란다. 너의 껍데기는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했고, 나의 껍데기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니까 말이야. 너는 내가 우는 걸 못 견뎌했고, 나는 갑자기 차가워진 너를 견딜 수 없었어. 물론 사춘기를 거치면서 네 성격이 달라질 거라 기대했지. 그런데도 막상 그때는 참을 수 없이 힘들었단다. 내 앞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만 같았어. 어떻게 너를 대해야 할지 모르겠더구나. 밤이면 지금 너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가다듬었어. 아무 문제없이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은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아침이 되고, 눈앞에서 문을 꽝 하고 닫힐 때면 얼마나 절망적이었던지. 그저 울고만 싶었어. 나에게는 그런 널 견뎌낼 만한 에너지가 없었어. --- p.28~29
그 시대에 여자와 남자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았지. 남자들에게는 직업도 있고, 정치도 있고, 전쟁도 있었어.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곳이 많았던 거야. 하지만 여자들은 아니었지. 수많은 세대에 걸쳐 우리는 침실과 부엌과 욕실에만 갇혀 있었어. 그곳에서 똑같은 분노와 불만에 수백만 번도 더 괴로워했지.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되었냐고? 아니야. 난 단지 이 모든 것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명확히 보려고 할 뿐이야. 성모마리아 승천 축일날 밤, 바다 위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갔던 일 생각나니? 가끔씩 높이 올라가기도 전에 꺼져버리고 마는 폭죽들이 있었지. 내 어머니의 삶, 할머니의 삶, 그리고 내가 아는 많은 여자들의 삶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그런 거란다. 하늘 높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낮은 데서 칙 하며 꺼져버리는 불꽃. --- p.68~69
“혀는 아픈 이를 건드린다.” 이 속담이 그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하겠지. 하지만 깊은 관련이 있단다. 그때 일이 자꾸 떠오르는 건, 내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야. 네 엄마는 나를 안고 울고 있었어. 아주 잠시 동안 그 애의 껍데기가 벌어졌고, 그 좁은 틈으로 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였지. 그럴 수만 있었다면 그 애의 인생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어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그러려면 아주 단호한 태도가 필요했겠지. 그 애가 가라고 했을 때도, 난 그냥 거기 머물러야 했어. 근처에 숙소를 잡고 매일 그 애를 찾아가서는 틈새가 다시 열리도록, 그 안으로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애써야 했어. 사실 거의 그럴 뻔했었지. --- p.88~89
‘뱀 사다리’ 게임 알지? 주사위를 던져서 뱀 자리에 가면 내려가야 하고, 사다리 자리에 가면 올라가는 게임 말이야. 인생도 그와 비슷하게 전개된단다. 올라가기도 했다가 다시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뭔가를 이루기도 했다가 다 잃어버리기도 하고. 갈림길에 선다는 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과 맞부딪히게 된다는 뜻이란다. 그들과 합쳐지게 될 것인지, 끝내 모른 채 지나치게 될 것인지는 오직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지. 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발걸음에 따라 너와 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단다. --- p.91
가장 기본적인 진실들이 오히려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걸 아니? 그때 진짜 사랑은 ‘강인함’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강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돼.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 남들이 전혀 모르는 깊숙한 비밀까지도. 하지만 삶은 온갖 사건들의 연속이고, 평범한 사람들은 거기에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어.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강해질 수가 있다는 걸까. --- p.109~110
그때 내 눈앞에는 정원을 돌아다니는 너댓 살 무렵의 그 애 모습이 보였어. 좋아하는 인형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난 부엌에 있어서 뭘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끔씩 그 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지. 아주 따뜻하고 행복 가득한 웃음이었지. 그래. 한 번이라도 행복했던 적이 있다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어. 그 어린아이에서부터 다시 한번 삶을 시작해보는 거야. --- p.146
어느 날 넌 내게 엄마를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어. 천국은 너무 넓은데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이야. 난 너에게 천국은 큰 호텔 같은 거라고 했지. 사람들이 죽으면 그 호텔에 방 하나씩을 얻게 된다고. 그래서 생전에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거기서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지내게 된다고. 한동안은 이런 말로 널 안심시킬 수 있었지. 하지만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금붕어가 죽었을 때 넌 그 얘기를 다시 꺼내더구나.
-그런데 천국의 방이 다 차면 어떻게 해요?
-천국의 방이 다 차면 눈을 감고, “넓어져라, 방들아” 하고 계속해서 말해. 그러면 순식간에 방들이 커지게 될걸? --- p.197
너도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랑의 효과가 얼마나 다양하고 재밌게 나타나는지를 알게 될 거다. 네 안에 사랑이 없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세상 어떤 남자도 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야. 그러다 어느 한순간, 한 사람이 네 마음을 훔치고, 너도 그에게 온 마음을 쏟기 시작하면 이상한 일이 생겨.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너를 쫓아다니기 시작하는 거지. 너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사랑을 달라고 애걸하면서 말이야. 이게 다 몸과 마음 사이에 창문들이 열리기 때문이란다. 일단 그 창문들이 열리면 몸은 마음을, 마음은 몸을 거울처럼 환하게 비춰 서로를 빛나게 해주지. 아주 빠른 속도로 따뜻한 후광이 생겨나서 널 감싸게 될 거야. 이 후광이 바로 남자들을 끌어들이지. 꿀 냄새가 곰을 끌어들이듯이. --- p.208~209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세 달을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난 이 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전화기 옆의 메모지에 적어놓았었지. 바깥에서만 보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뭔가 잘못되고, 비이성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처럼 느껴지고 그들의 인간관계에 대해 오해하기도 쉽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아주 깊게 살펴봐야만 그의 행동 방식, 동기, 감정 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단다. 이런 이해는 많이 안다는 자만심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겸손에서 나오는 거야.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인디언 속담처럼 행여나 내 신발을 신어볼 마음이 들까? 그러길 간절히 바란다. 네가 그렇게 방과 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 보기를, 정원의 호두나무에서 벚나무로, 벚나무에서 장미로, 장미에서 소나무로 수없이 왔다 갔다 해보기를 바란다. 날 동정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죽은 후 용서받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야. 단지 너와 너의 미래를 위해서란다. 거짓에 방해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네가 존재하기 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부터 이해해야 해. --- p.240~241
넌 세상 모든 것들의 안에도 있어 보고, 바깥에도 있어 봐야 해. 그래야 그늘과 휴식처를 제공할 수 있고, 너 자신도 적당한 계절에 무성한 잎들,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네 앞에 수많은 길들이 열려 있을 때, 그리고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를 때, 그냥 아무길이나 들어서진 마. 내가 세상에 나오던 날 그랬듯이, 자신 있는 깊은 숨을 내쉬어 봐. 어떤 것에도 현혹당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고 기다려 보렴. 네 마음이 하는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봐. 그러다 네 마음이 말을 할 때, 그때 일어나서 마음 가는 대로 가거라.
--- p.278~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