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두 문장을 비교해보자. “배고파.” “나는 배가 고프다.” 무엇이 다를까? 첫 번째 문장은 그저 자신의 상태를 말하고 있고, 두 번째 문장은 그 배고픔을 느끼고 말하는 주체가 ‘나’라는 것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 달라. 저 사람, 저 아저씨, 저 꼬마가 아니라 ‘내’가 배가 고프다는 말, 혹은 내가 지금 기쁘거나, 슬프거나, 용변이 급한 게 아니라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하고 있어. 즉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해 가리킬 수 있고, 또 나의 상태나 속성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파악해 서술할 수 있다는 거야. 이렇게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그 대상이 된 나를 일컬어 ‘자아’라고 해. 즉 “배고파.”라는 문장에서는 자아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나는 배가 고프다.”라는 문장에는 자아가 드러난 셈이지. 이렇게 자신을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나 극소수의 영장류만 가지고 있는 능력이야.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생각하거나 관찰하지 못해. 예컨대 느껴지는 배고픔이 주는 충동에 따라 음식을 탐할 뿐, “나는 배가 고프고, 따라서 음식을 구해야만 한다.”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 p..22~23
사람은 자동화된 기계가 아니야. 시키는 일을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반복해야 한다면 아마 정신이 이상해지고 말 거야. 당장 너 희들만 해도 숙제하는 거 싫어하잖아? 반면에 뭔가 할 마음이 생기 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그 일을 하는 게 바로 사람이야. 그러니 사람은 어떤 특정한 방향의 행동을 하도록 하는 내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그 힘을 바로 ‘동기’라고 해.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한 거지? 동기가 뭐야?”처럼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이야. 사람은 자기 가 한 행동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동기라고 볼 수 있어. 동기 중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어떤 목적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야. 뭔가가 필요한데 없거나 부족하면 우리는 이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되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하게 되지. 만약 모든 욕구가 다 충족되면 동기가 사라져서 아무런 활동도 못할까봐 걱정되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고, 충족된 욕구가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키니까. --- p.40~41
오늘날 지식을 얻는 방법으로 가장 유력한 것, 사실상 거의 유일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과학이야. 과학이라고 하면 실험실, 복잡한 수식 아니면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어려운 내용들을 가리키겠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과학의 일부에 불과해. 엄밀히 말하면 그것들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통해 알아낸 지식, 즉 과학지식들이지. 과학은 어떤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과 태도를 말해. 그러니까 실험실이나 복잡한 수식이 없어도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 과학적이라면, 그렇게 얻은 지식은 과학지식이고 연구 분야는 과학이야. 이러한 방법으로 자연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면 자연과학이고, 사회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면 사회과학, 사람의 생각에 대해 알아내고자 하면 심리과학 혹은 인지 과학이 되지. 그렇다면 과학적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논리적인 설명, 경험적인 증거로 증명하면서 지식을 알아나가는 방법이야. 한마디로 요약하면 논리와 증거지. 이 논리와 증거라는 잣대에 맞지 않는 주장은 모두 의심하는 것이 바로 과학의 첫걸음이야. --- p.64
뇌는 도대체 무엇일까?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에 들어 있는 기관일까? 물론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만, 뇌는 그 모양이 아니라 기 능을 가지고 정의해야 해. 어떤 생물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외부의 정보에 따라 신체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기관이 바로 뇌야. 즉 가장 원시적인 뇌는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기관과 그 정보에 따라 운동과 행동을 지시하는 운동중추로 이루어져. 그러니까 식물에게는 당연히 뇌가 없겠지? 이 감각과 운동이 단순하면 뇌도 단순하고, 복잡하면 뇌도 복잡하겠지. 예를 들면 바퀴벌레 같은 곤충은 뇌(뇌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하다) 에는 “꼼짝 마.” “달려.” “방향을 전환해.”와 같은 기초적인 운동 명령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어. 그럼 이 기초적인 운동 명령들 중 어떤 명령을 내리는지를 몸이나 눈 또는 더듬이 등에서 들어오는 정 보에 따라 결정하는데, 이 과정은 생각의 과정이 아니라 거의 반사적인 과정이지. 특정한 자극에 대응하는 특정한 운동 명령들이 반사적으로 내려지도록 되어 있으니까. --- p.78
인간의 배움, 즉 학습에 대해서는 2가지 대립되는 의견이 있었어. 하나는 사람의 배움이 원래부터 타고나는 것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가 사람의 배움은 외부 세계와의 경험에 대한 기록이라는 주장 이지. 언뜻 들으면 두 번째 주장이 맞는 것 같지?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첫 번째 주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바로 소크라테스가 주장했던 상기론이야. 상기론은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 알아야 할 것을 다 알고 있는 상태로 태어난다는 이론이야. 우리가 배운다고 생각하는 과정은 사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거지. 그럼 이미 알고 있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웠다는 것일까?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천상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같은 곳에서 배웠다고 해. 즉 영혼의 세계에서 이미 다 배운 것을 육체를 가진 사람이 되면서 잊고 있었는데, 그것을 다시 하나하나 상기해나가는 과정이 배움이라는 거지. 그러니 교육이란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거나 알고 있는 것을 깨우쳐주는 게 돼.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교육방법을 ‘산파술’이라고 불러. --- p.87~88
창의적인 인재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창조의 순간에 대해 기술한 자료를 정리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해. 우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엄청나게 긴 시간을 일했는데 찰나의 순간으로 느낌), 아주 고난이도의 일이나 위험한 일을 하는데도 오히려 물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 하늘을 날아가는 것처럼 자유로운 느낌,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는 듯한 느낌 등을 느꼈다고 해. 이 중 눈에 두드러지는 것이 시간 개념 왜곡현상이야. 아주 긴 시간 동안 몰두했는데도 마치 찰나의 시간만 지나갔다고 느끼는 거지. 아마 너희들도 한 번쯤은 경험했을 거야. 만화책을 보는 시간이나 공놀이를 하는 시간은 정말 빨리 가지 않아? 수업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지나갈 거야. 또 아주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면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지. 하지만 학교 수업을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연속으로 한다면 과연 견뎌낼 학생이 얼마나 있을까? 바로 이렇게 무엇인가에 몰두하느라 긴 시간이 아주 짧은 순간처럼 느끼는 것이 시간 개념 왜곡현상이야. --- p.132~133
왜 따로 떨어진 학문과 분야들을 자꾸 섞으려고 할까? 이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칠 현실 세계의 문제가 ‘융합적’이기 때문이야. 예를 들면 자연현상에서 물리적 현상, 화학적 현상, 생물학적 현상이 따로 구별되어 나타나지 않아. 심지어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따로 구별하는 것조차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예를 들면 어떤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려고 하는데 주민들이 반대한다고 치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리학·경제학·물리학·생태학 등의 지식이 모두 활용되어야 해. 초등학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지구온난화 역시 단지 기상학만의 문제가 아니지. 화석연료를 대신할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해 야 하니 화학과 관련된 기술의 문제이고, 탄소를 많이 유발시키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에서는 철학과 윤리학의 문제가 되 며,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목표 아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은 정치의 문제가 돼. 또 고에너지 소비 산업 구조를 신재생에너지에 기반을 둔 산업구조로 바꾸는 것은 경제의 문제지. --- p.139~140
창의성과 비슷한 정도로 요즘 각광을 받는 말이 아마 ‘혁신’이 아닐까 싶어. 이 둘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달라. 창의성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거지만, 혁신은 기존의 것을 더 좋게 만드는 획기적이고 신선한 아이디어나 변화를 뜻해. 그 혁신의 결과가 바로 발명이야. ‘더 좋게’라는 말에 주의하자. 새로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변화의 결과가 기존의 것보다 확연하게 긍정적인 변화로 나타나 야 하는 거니까. 하지만 ‘더 좋게’ 바꾸는 것을 다 혁신이라고 하지는 않아. 그렇게 하면 ‘개선’이나 ‘개량’과 구별이 안 되잖아? 혁신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innovation’은 ‘안에서 밖으로’를 뜻하는 ‘in’과 ‘새롭다’라는 뜻의 ‘nova’가 결합한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서 새로운 것을 들여온다기보다는 원래 있던 내부에서 새로운 변화의 단초를 찾아내는 거지. 단순히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면서 더 좋게 만드는 게 혁신이야. 세계적인 전자회사 필립스의 “Make things better.”라는 광고 카피가 이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어. --- p.145~146
우리가 돈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시장경제 체제에 살고 있기 때문이야. 시장경제란 돈을 가지고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입하는 경제 체제를 뜻해. 그래서 돈이 많은 것이 결국 재화와 서비스가 많다는 것과 같은 뜻이 돼. 하지만 여기가 사막 한복판이라면 어떨까? 돈이 아니라 물 혹은 낙타가 많은 사람이 부자겠지. 실제로 유목민들은 아직도 낙타나 염소 같은 가축을 부의 기준으로 삼고 있고, 우리나라도 100년 전 만해도 집에 쌀이 몇 석인지가 부의 기준이었어. 만석꾼 혹은 천석꾼이라고 부르면서 말이야. 하지만 재화와 서비스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부유한 것은 아니 야. 중요한 건 이 재화와 서비스가 다른 것들과 교환할 수 있어야 하지. 나한테만 쓸모 있고 다른 사람한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재화와 서비스라면, 그게 아무리 많이 남아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냥 버릴 수밖에 없는 거지. 그렇다고 모두에게 쓸모가 있는 재화와 서비스라도 그걸 얻는 과정이 아주 간단해서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다면, 그게 나한테 남아돌아도 어떻게 다른 것과 교환할 수 있겠어? --- p.168~169
봉건사회에서 세금은 국가 사용료의 개념이었어. 국가가 왕의 것이었거든. 그러니 그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일반 백성들은 왕 혹은 왕에게서 권리를 위임받은 귀족에게 국가를 사용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지. 물론 왕이나 귀족은 백성들한테서 걷은 세금의 대가로 특별히 무언가를 해줄 필요가 없었어. 내 땅에서 농사도 짓게 해주고, 장사 도 하게 해주었으면 그만이지 뭘 더 해주겠어? 집주인이 세입자한테 월세를 받는 대가로 집에서 살게 해주기만 하면 되지, 다른 일을 해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집주인은 세입자가 낸 월세를 누구를 위해 쓰지? 당연히 자신을 위해 쓰지. 그 돈으로 도박을 하건, 주색잡기로 탕진하건 간에 세입자가 이러쿵저러쿵 할 일은 아니지. 마찬가지로 왕이나 귀족 역시 백성들에게서 거둬들인 세금을 자기 자신을 위해 썼어. 그 돈으로 궁전을 짓건, 사치스러운 유흥을 즐기건, 혹은 전쟁을 하건 백성들은 가만히 있어야 했지. 하지만 근대 민주국가에서는 시민들이 나라의 주인이야. 따라서 세금을 사용료 개념으로 볼 수 없어. --- p.189~190
사람이 아름다움을 즐기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예술작품이야. 예컨대 아주 원시적인 부족들조차 그들이 사용하는 조잡한 무기나 거주하는 움집에 어떤 형식이든 장식을 하 고, 나름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지. 물론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는 장식이나 노래, 춤이 부족 간의 가치를 공유하고 결속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그 건 아니야. 일단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런 기능을 했던 거지. 무기에 무늬를 새기거나, 움집에 여러 가지 장식을 걸거나, 무아지경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는 원시 부족 사람들이 “아, 이걸 해서 우리 부족의 가치관이 공유되고, 결속이 더 튼튼해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그 순간 그들은 그런 장식이 보기 좋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야. 즉 그 행위는 무관심적 관조의 행위, 순전한 미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이와 같이 순전히 미적인 목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활동이 바로 ‘예술’이야. 예술작품은 활동의 결과인 셈이지. --- p.215~216
예술에는 과연 등급이 있을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 하지만 예술작품에는 분명히 등급이 있지.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경험과 감흥을 제공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는 작품이 있을 수도 있어. 그래서 우리는 예술작품을 ‘걸작’과 ‘졸작’으로 분류하지. 하지만 졸작이더라도 예술작품인 것만은 분명해. 하지만 작품 그 자체의 수준이 아니라 그 작품이 속한 장르에 따라 처음부터 예술이 고상한지 천박한지가 결정된다고 한다면 어떨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작품이 중요한데, 작품이 나오기도 전에 미리 고상한 예술인지 천박한 예술인지를 정해둔다는 것은 말이 안 돼. 그런데 실제로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미리 예술의 가치를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어. 예를 들면 어떤 연주자가 검은색 정장을 입고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려고 하는 모습과 이른바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면,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들어보기도 전에 정장을 입은 사람이 더 수준 높은 음악을 할 것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판단해버려. --- p.220~221
감수성은 내 것이 아닌 외부의 것을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야. 예를 들면 ‘문화적 감수성’은 다른 나라나 사회의 문화를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정서적 감수성’은 다른 사람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은 것이지. 요즘 들어 이렇게 감수성을 부쩍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시대에 다른 사람, 다른 존재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능력이며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감수성은 이제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지. 20세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었어. 재클린 케네디는 남편의 장례식 때 슬픔을 억누르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서 칭찬을 받았지. 하지만 요즘에는 간혹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멋있다고 말해. 그렇다고 아무데서나 눈물을 보여 서는 안 돼. 눈물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니까. 내가 아프고 고통스럽고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과,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고 그 고통을 내 것처럼 느껴서 흘리는 눈물은 다르거든. --- p.229~230
협동·경쟁·갈등을 막론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대부분은 주먹다짐을 하기 전까지는 서로의 생각을 여러 가지 상징으로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일어나. 사실 주먹다짐도 정말 상대방에게 심각한 신체적 위해를 가하기보다는 자신의 분노와 적대감을 상대방에게 드러내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강해. 그래서 주먹다짐이 둘 중 하나 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아. 이렇게 서로의 생각이나 표현, 즉 의사표현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이에 따라 서로의 행위를 조정해나가는 과정을 의사소통이라고 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회 안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의미인데, 그 상호작용은 결국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지. 어렵게 들리니? 전혀 어렵지 않아. 오히려 간단 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와 말이든, 글이든, 혹은 몸짓 같은 것을 주고받는 가운데 서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조절해가며 살아간다는 거야.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우리의 의사소통 행위는 주로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어. --- p.258
루키우스 술라는 무려 2년이나 독재관직을 움켜쥐었고, 이게 로마 공화정 몰락의 신호가 되었지. 심지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독재관의 임기를 죽을 때까지로 바꾸어버렸고, 결국 부르투스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을 때까지 독재관으로 군림했어. 이런 경우 바로 독재관은 독재자가 되고, 독재자가 행하는 정치는 독재정이 되는 거야.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은 독재자가 반드시 나쁜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야. 매우 유능한 독재자가 있을 수 있고, 또 독재자가 매우 관대한 통치를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아무리 유능하고 너그러운 통치를 하더라도 독재는 독재야. 유능하고 관대한 통치와 무능하고 폭압적인 통치의 선택권이 독재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면, 현재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와는 무관하게 그 정치는 독재정이 되는 거야. 그래서 로버트 달은 민주정치의 큰 특징을 폴리아키(polyarchy), 즉 통치자가 여럿이라는 점에서 찾았어. 우두머리가 여러 명이고, 우두머리들이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으며, 우두머리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들이 있는 정치 체제가 바로 민주정치라는 거지.
--- p.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