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 번도 멈추지 않은 것.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멈춰 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히 관찰했어야 했다. 내 인생은 오롯이 나의 것인데, 나는 어째서 남들의 시간표에 내 인생을 짜 맞추려 그렇게 발버둥을 쳤을까. --- p.19
터였다. 실제로 내가 거쳤던 모든 회사들은 그 시스템 속에서 잘만 굴러갔다. 하지만 나는 괴로웠다. 내 인생이 괴로운데, 당사자인 내게 이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민의 흐름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규모나 업계, 업무의 성격과 관계없이 비슷한 성격의 괴로움을 느낀다면, 나는 특정한 회사가 아니라 회사라는 조직 자체에 맞지 않는 사람인 게 아닐까? 한마디로 ‘회사 체질’이 아닌 것 아닐까? --- p.29
나는 일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시간과 감정을 담보로 무정하게 돌아가는 이 조직이 싫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조직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테고, 어떤 이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조직이 주는 혜택과 보호막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답답함과 우울함이었다. 이렇게 체질에 맞지 않는 공간에 갇혀 있는 한 언제까지고 이 괴로움을 월급으로 마취시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1
이제 나는 우중충한 기분을 감춘 채 좋은 아침이라고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안녕한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의 안녕을 물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 대가로 매달 25일 들어오던 월급을 포기한 기분은 뭐랄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 p.71
고만고만한 실력만 갖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에 대한 깨달음은 맨 처음 퇴사를 결심했을 당시 내 마음을 괴롭혔던 질문을 또다시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평범한 전공에, 평범한 경력에, 취미와 특기마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가, 도대체 무슨 수로 눈에 띄는 플러스알파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 --- p.99
나는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 홀로 서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배웠고, 다른 건 몰라도 그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는 사실만큼은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객인 출판사 입장에서 본 나는 여전히 경력 하나 없는 무명의 신인에 불과했고, 당연한 일이지만 실력도, 신뢰도 보장되지 않는 무명의 신인에게는 그 누구도 선뜻 일감을 맡겨 주지 않았다. --- p.118
퇴사 전에 나름대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배움의 과정이 다 끝난 이후의 미래까지 내다볼 수는 없었다. 더 이상은 학생이라고 핑계를 댈 수도 없는 마당에 이 애매한 시기가 기약 없이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처음부터 넉넉하지도 못했던 희망과 자신감을 자꾸만 좀먹었다. --- p.119
모든 전전긍긍과 안절부절못함을 감안하고라도, 첫 책을 번역하던 기간은 기본적으로 꿈을 꾸는 듯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따금씩 내가 회사 밖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지금 이 자유를 얻기 위해 그 오랜 기간 불안을 달래며 꿋꿋이 걸어왔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찼다. 유혹에 흔들리고 서러움에 무너진 적도 분명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 낸 나 자신이 너무나 대견했다. --- p.170
나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못 된다. 백화점 쇼윈도에 진열된 가방은 너무 비싸고, 원고료를 받은 날 큰맘 먹고 들른 정육점에서도 한우 등심이 담긴 팩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호주산 갈비살을 계산대에 올려 놓기 일쑤다. 하지만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외국어로 된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종종 후배들을 만나면 기꺼이 밥을 사주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설이 나오면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서 구입해 읽는다. 나는 3년 전 내가 그토록 바라던 ‘회사 밖에서 먹고살 수 있는 인간’이 된 것이다. --- p.190
프리랜서는 혼자서 최소한 네 사람 몫을 해 내야 하고, 그 일들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책임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프리랜서의 일이 직장인보다 네 배쯤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직장인과 프리랜서를 모두 경험해 본 장본인으로서 얘기하자면, 그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힘들거나 덜 힘들다고 단정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지극히 무의미한 짓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프리랜서의 일과에 일반적인 직장인보다 더 큰 자유와 책임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p.207
분야에 관계없이 경력이 짧은 초보 프리랜서라면 고객과 언제든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낮 시간 동안 늘 깨어 있는 편이 좋다. 들어오는 일이 많아서 골라잡을 수 있는 입장이라면 몰라도, 갑자기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클라이언트가 언제 전화를 해도 재깍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원래 맡았던 사람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급히 대신 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경우, 먼저 연락을 받는 사람이 임자 아닌가. 현실적으로 봤을 때 경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쉽고 재미있고 일정이 넉넉한 일보다는 이렇게 급박한 일이 들어올 확률이 더 높으며, 이때 기회를 손에 넣는 것은 보통 가장 먼저 연락이 닿는 사람이다. --- p.224
당신이 어느 정도는 회사 체질이면서도 동시에 회사 체질이 아닌 사람이라면, 특히 그중에서도 개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애쓰면서 한편으로는 사회생활의 고충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다행히도 당신에게 프리랜서라는 제3의 선택지를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이어질 장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프리랜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란 결국 회사 체질의 개인적 요소들을 모아 놓은 집합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p.255
프리랜서라는 목표를 갖고 달렸던 지난 몇 년을 되돌아보면, 이상하게도 못한 점보다는 잘한 점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내가 언제나 현명한 결정만 내리는 능력자여서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생이라는 알 수 없는 요소가 개입하여 대부분의 경험을 좋은 방향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거나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도 지나치게 당황하거나 지레 포기할 필요 없다. 책임감과 인내심을 갖고 버틴다면, 시간은 그 모든 경험에서 의미를 만들어 줄 것이다. --- p.283
체질은 잘못이 아니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 너는 어째서 복숭아를 만지면 두드러기가 나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만약 그가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숭아 과수원에서 일해야 한다면 당연히 남들보다 훨씬 힘이 들고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그의 잘못이 아니며, 성격이나 능력이나 인내심의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개인의 체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복숭아 과수원에서 일하는 방법밖에 가르쳐 주지 않는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 p.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