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저마다 생각에 잠겨 말없이 걸어갔다. 디트는 태린이 피피 이식을 받으면 돈을 왕창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 영원히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태린은 디트가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피피 이식은 불법이다. 그래서 피피 이식에 연루되었다 붙잡히면 누구라도 종신형을 받는다. 평생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요즘은 수명이 매우 길다. 따라서 종신형도 그만큼 길어진다. 오래오래.
하지만 피피 이식은 마음을 당기는 데가 있었다. 피피(PP)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 피터팬(Peter Pan)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말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술을 피피 이식이라고 한다. 아이로 영원히 사는 것에는 뭔가 유혹하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 p.11~12
그래, 시간이 가고 있다. 맞는 말이다. 시간은 항상 가고 있다. 하지만 마흔 살의 얼굴을 하고 저기에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멈춰 있다, 아니 그런 것 같다. 하루하루는 영원처럼 길고, 오후 시간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고, 밤은 끝없이 이어질 것 같다. 해야 할 일을 다 한 사람은 이제 무엇을 할까? 경험할 것을 모두 경험한 사람은 이제 무엇을 경험할까? 가볼 곳을 모두 가본 사람은? 읽어야 할 것을 모두 읽은 사람은? 들어야 할 음악을 모두 듣고, 알아야 할 이야기를 모두 안 사람은? 모든 교향곡에 들어 있는 모든 운율을 알고, 모든 노래의 모든 음표를 알고, 모든 이야기의 모든 반전, 모든 그림의 모든 붓질을 알아버린 사람은? 이제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 p.22~23
태린은 나무를 타고 내려가면서 데이비 부인의 남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마 남편은 모를 것이다. 오후의 아이를 갖는 것은 부인의 비밀이고, 비밀스러운 기쁨이고 갈망일 것이다. 오후의 아이로 진짜 아이, 진짜 남자아이를 가져보는 것. 진짜 남자아이는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피피 이식을 받은 아이, 즉 피피는 더 싸다. 디트가 요구하는 돈의 반만 내면 피피를 빌릴 수 있다. 게다가 어떤 피피들은 매우 훌륭하다. 그건 당연하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이 노릇을 하며 고객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왔으니까. 다만 어떤 피피들은 그 일을 너무 오래 해서 자기 자신의 복제품으로 변해버렸다. 그들은 모든 장면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내 연기를 한다. 필요에 따라 귀여워질 수도 있고, 사랑스러워질 수도 있고, 껴안고 싶게 변할 수도 있다. 고객이 원하면 갑자기 짜증을 낼 수도 있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응석 부리고 발을 동동 구를 수도 있다. 그렇게 그들은 아이 노릇을 하지만, 사실 아이로서의 삶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그들의 얼굴과 몸은 아이의 것과 완벽하게 똑같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 세상에 이제껏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새로운 종족의 것으로 변해버렸다. --- p.41
“아, 그래. 그자들이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하진 못했지만 200살 이상까지 살 수 있게 했지. 그건 성서에서 말한 70살의 세 배나 돼. 한데 아무도 죽지 않고 인간이 계속 태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냐?”
“세상이 복잡해지겠죠.”
“바로 그거야, 꼬맹이. 내가 널 제대로 키웠구나. 세상이 복잡해지면 우린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서 있어야 하고, 땅속에 사는 흰개미들처럼 우글우글 떼 지어 다녀야 할 거야. 꼬맹이, 그래서 이 세상이 이런 상황을 고쳐보려고 어떻게 했을까? 더는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 했을까? 이 세상이 어떻게 복수했을까?”
“사람들이 임신을 못 하게 한 거군요.”
“맞았어, 꼬맹이. 임신을 못 하게 해서 사람들이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거야. 사망률이 떨어진 동시에 출산율도 떨어졌지. 하! 난 이 세상이 마음에 들어. 이 세상의 유머 감각이 마음에 들어. 똑똑한 체하는 인간들,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에게 이 세상이 복수한 방식이 마음에 들어. 그자들은 우리를 곤경에 빠뜨려놓기만 했지 곤경에서 구해내진 못하잖아. 아주 잘됐어. 암, 그렇고말고!”
“일부 사람들은 빼고요. 그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를 낳을 수 있잖아요.”
“그래, 아주 운이 좋은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물론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꼬맹이,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운이 좋은 걸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아이 못 낳는 사람들한테서 질투와 미움을 받고, 또 아이를 빼앗길 위험에 빠져 있는데 과연 운이 좋은 걸까?”
--- p.7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