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으로 인지하고 공감 능력이 있는 인간이 표현 능력을 가지면 자신의 입장을 취할 가능성을 상실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머문다. 그러나 이 수동성은 단지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인지로부터 나오는 수동성이다. (…) 객관적인 인간, 즉 인지하는 인간은 판단하거나 강인함을 보이는 일, 즉 주도적으로 행동하거나 정서를 보이는 일을 할 수 없다. 니체는 공감이, 예컨대 자기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만 발휘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니체는, 인지하는 습관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입장을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객관적인 인간의 정체성은 정체성을 갖지 않는 데에 있다. 그런 사람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발자취도 남기지 않으며, 자아나 ‘나’라는 것도 없다. 객관적인 혹은 인지하는 인간의 ‘나’는 인지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인지하는 객관적인 인간은 정체성이나 ‘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인지와 공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_‘제1장 자아 상실’ 중에서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했고, 도덕적인 금기들을 깼으며, ‘정치적 올바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가 하면, 멕시코인, 무슬림, 여성, 장애인, 저널리스트를 향해 모욕적인 말을 퍼붓기도 했다. 대외 정책적으로 그는 군사적인 개입을 옹호하는가 하면, 무슬림들에게는 미국 입국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대내 정책적으로는 미국에 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을 모두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선거전에서 경쟁자들을 수차례 직설적으로 중상 비방했다. 동시에 다른 정치인들보다도 자주 말을 바꾸는가 하면,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고, 거짓을 퍼뜨리며, 정적들을 중상 비방하고, 진부한 성차별적인 발언들도 했다. (…) 그는 대중들의 상상이 자신을 향하게 했다. 즉 모든 관찰자가 그에게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취하게 만든 것이다. (…) 그의 정서들, 분노의 폭발, 금기에 대한 도전, 과도한 자의식은 정치적인 아웃사이더라는 이미지와 합쳐짐으로써 상당수의 국민이 결국 그의 시각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가 ‘모든 사람에게 맞서는 한 사람’으로 서면서 오히려 사람들이 그에게 공감하게 되었고 그는 더욱 매력적인 인물이 되었다. (…) 트럼프의 모든 감정 폭발은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이제야말로 제대로”라는 슬로건대로 그들이 제대로 선택했음을 입증해줄 뿐이었다. 그들은 그가 (스스로 잘못한 일들에 대한) 비난에 맞서 자신을 어떻게 방어할지 열광적으로 기다렸다. _‘제2장 공감, 이원론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다’ 중에서
사디즘적인 후원자와 비슷한 인물로는 ‘사디즘적이면서 공감적인 대변자’가 있다. 이 대변자는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느끼면서 그의 편을 들지만 사실 그런 역할 속에서 재미를 느끼고 확증을 얻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바로 대변자 역할을 하기 위한 전제가 되기 때문에 그는 상대방의 상태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한편 그의 고통이 지속되도록 노력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사디즘적이고 공감적인 대변자는 문학작품의 독자나 영화 수용자일 수도 있다. 관찰자는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고 부당함에 분노하며 상황이 전적으로 개선되기를 바라면서 고통받는 사람의 대변자가 된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은밀히 다른 사람의 희생을 대가로 자신의 동감과 대변자 역할을 즐긴다.) _‘제4장 공감을 위한 공감’ 중에서
헬리콥터 부모와 스테이지 맘에 관한 문헌들에 따르면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들을 경쟁력 있는 완성물로 세우기 위해 “자기 자녀들을 위한 꿈의 작업에 자신들도 관여하려고 한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부모들의 숨겨진 흡혈귀 행위나 나르시시즘의 구실로 교육이 이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긍정적으로 설명하자면 부모가 자녀와 함께 체험하는 데는 정당하게 자녀를 보살피고 싶어 하는 충동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모가 무엇을 얻는지는 분명하다. 부모가 해야 하는 몹시 소모적인 임무가 곧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결과를 낳을 기획이 되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 부모가 자녀 교육이라는 임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중요한 요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문제가 되는 헬리콥터 양육은 역설적이게도 좋은 교육을 위한 동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_‘제5장 일상 속의 흡혈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