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가 ‘독이 든 열매’에서 ‘최음제’가 된 이유는 통역상의 오류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고 한다. 여행중이던 한 프랑스인이 처음으로 토마토를 먹게 됐는데 아주 맛있었다. 그래서 요리를 만들었던 이탈리아 주방장에게 어떤 음식이냐고 물었고, 이 주방장이 불어로 ‘무어인의 사과Pomme de Moors(Apple of the Moors)’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프랑스인이 이를 ‘사랑의 사과Pomme d’Amore(Apple of Love)로 잘못 알아들었고, 최음제로 여겨 그 다음부터 기피 식품이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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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람들은 원래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벼농사를 짓는 베트남에서 소는 농민들한테 생산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잡아먹을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육류로 만든 음식은 주로 돼지고기나 해산물 요리가 발달했을 뿐이었다. 185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베트남을 침공한 이후 1884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자 식민지 지배자였던 프랑스 사람들은 하인인 베트남 주방장에게 쇠고기를 얹어 쌀국수를 만들도록 요구했다. 즉 현재 먹는 베트남 쌀국수는 전통적인 현지 음식이라기보다 프랑스풍의 음식으로 변질되면서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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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는 굴이야말로 정력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었던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거의 매일 50개씩의 생굴을 먹었다고 한다. 굴을 먹는 방식도 독특해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인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두었다. 그러면 벌거벗은 여자가 몸을 담그고, 다음에 카사노바가 욕조로 들어갔다. 이때 하인이 접시에 50개의 생굴을 담아오면 옷을 벗은 애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굴을 먹고 그 다음에 따뜻한 욕조에서 ‘해장 섹스’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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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빵의 역사’는 오랜 기간 동안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빵의 색깔과 종류를 놓고 신분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자격이 구분됐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농부는 딱딱한 검은 빵만 먹을 수 있었고, 흰색의 부드러운 빵은 귀족과 시민 계층의 몫이었다. 시저Caesar 시절에는 죄수들에게 검은 빵이 제공됐다. 검은 빵은 톱밥이나 진흙, 도토리, 나무껍질 등을 몰래 집어넣어 만들어도 잘 표시가 나지 않았고, 심지어 독을 집어넣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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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아가 유럽 왕실과 귀족 사회에서 보편화된 것은 13세기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로마시대에도 캐비아를 먹었고, 귀한 음식이었던 만큼 특등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캐비아가 식탁에 오를 때는 그 의식이 요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냥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꽃으로 장식한 접시에 모셨으며, 식탁에 오르는 순간에는 악대가 팡파르를 울려 영광을 기렸다고 한다. 프랑스 부르봉Bourbon 왕조의 루이 13세는 유독 캐비아를 즐겼다. 최상급 캐비아를 먹기 위해 주산지인 카스피해 연안으로 직접 시종을 보내 캐비아를 날라오도록 했다. 만약 중간에 캐비아를 빼돌린 사람이 있으면 목을 쳐 죽이는 참수형을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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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는 불火에 해당하고 복날三伏은 쇠金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로써 쇠를 이기니火克金 더위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복날 보신탕을 먹지만 옛날부터 개고기를 먹어온 중국은 우리와 달리 한겨울인 동지冬至에 보신탕을 먹는다. “삼복三伏에 보신탕을 먹는 것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요, 삼구천三九天에 먹는 보신탕은 추위를 쫓기 위해서다(三伏天吃狗肉避署, 三九天吃狗肉驅寒).”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삼구천은 동지를 지나 19일째부터 27일째를 말하는 것으로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추울 때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보신탕을 한여름인 복날보다는 동지가 지난 겨울철에 보양식으로 즐겨 먹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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