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10여 년간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특히 서구와는 달리 보수의 상대어로 급진이나 혁명이라는 용어가 아닌 진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단순히 한자의 뜻으로만 보면 보수(保守)는 ‘보호하고 지킨다’라는 의미이며 진보(進步)는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논쟁은 단어가 주는 의미 이상의 복잡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핵심을 이해하기가 사뭇 혼란스러운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보수와 급진 혁명의 논쟁이 서구 사회에서 유래된 것이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의미는 더욱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 p.4
19세기 말 공산혁명의 슬로건이야말로 무산대중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계급 없는 사회(classless society)에서 ‘능력만큼 일하고 원하는 만큼 가지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하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혁명을 부정한 기득권 세력들은 혁명 세력의 미래에 대한 약속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도 변화를 통하여 민중에게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등장된 것이 바로 ‘개혁(reform)’이라는 용어이다. 한마디로 개혁이란 용어는 보수 세력이 혁명 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서 사용한 것이다. 정치학에서 격언처럼 이해되는 “혁명의 위험이 없이는 개혁도 없다.”라는 말은 이러한 상황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개혁이란 혁명 세력이 사용하는 용어인 것 같으나, 그 근본을 따지고 보면 혁명에 대한 상대어로 사용된 것이다. --- pp.10~11
현실을 따른다 함은 현실을 수용하면서 자아의 안정을 취하려는 욕망을 말하며, 이상이나 기쁨의 원리를 따른다 함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의식하지 않은 채 자아이상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려는 욕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개의 무의식적 욕망이 인간에게 자리하는 한 인간은 현실에 순응하려는 욕망과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실에 순응한다는 것은 현실에 위협을 느끼거나 아니면 현실 그 자체에 별 불만이 없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므로 자연히 현실을 지키려는 그리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적(donservative)인 태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려는 욕망은 현실 그 자체에 불만이 있거나 혹은 현실을 넘어선 이상을 따르려는 감정이므로 보수의 대칭적 용어인 혁명적(revolutional)인 태도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보수와 급진이라는 사회적 갈등은 인간 내부의 무의식적인 동적 양상이 정치 · 사회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