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분투하며 희생하고 살았지만 매 순간 세상 앞에 무너지다가 결국 단명한 부모를 둔 자식이라면, 그런 부모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세상 앞에 증명해 보이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머리도 감지 않은 채 다가올 내일을 두려워하며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내 환상은 아주 무참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 마침내 소파에서 일어나 머리를 감고, 예전에 모라이스와 만났던 캘리포니아의 낙농장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섬이 되는 대신, 섬을 찾아가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 p.37~38
차 안에 있을 때 조가 내게 예를 들어 설명해줬다. “프랭크 사장님은 회사에 있는 모든 컴퓨터에 이런 메모를 붙여놨어요.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그런데 그건 아조레스 방식이 아니거든요. 아조레스 방식은 이렇죠. ‘오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일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오늘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두 해 전 테르세이라 섬에 있는 프랭크네 집을 고치던 남자들이 일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밧줄 투우를 보겠다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프랭크가 외쳤다. “이봐요! 돈 주는 사람은 나라고. 돈 주는 사람이 중요합니까, 투우가 중요합니까?” 그들은 “당연히 투우죠”라고 대답하고 집을 나섰다.
--- p.50
캘리포니아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아조레스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 면 나는 그런 사람들을 ‘열 번째 섬’이라고 일컬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말이 캘리포니아에 사는 아조레스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보스턴과 캐나다를 포함한 전 디아스포라를 아우르는 말이라는 걸 안다. “열 번째 섬이 어떤 장소나 특정 무리인 줄 알았던 거요?” 알베르투가 놀리듯 내게 물었다. “열 번째 섬은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오. 모든 게 떨어져 나간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죠. 두 세상을 오가며 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열 번째 섬을 조금 더 잘 이해한 다오. 어디에 살든 우리는 우리 섬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소.”
--- p.62~63
내 어머니 베벌리 여사의 사인은 루게릭병이었지만 의사들마저도 어머니의 병세가 그렇게 빠르게 악화된 건 어머니가 삶의 의지를 잃고 실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또 한 번 내 존재 너머에 존재하는 거대한 무엇 인가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동시에 익숙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세상에 수없이 많은 점이 존재하지만 내가 속한 점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혼자서 둥둥 떠다녀야 할 운명일까 봐 두려웠다. 이것이 내가 이민 이야기를 좋아하게 된 까닭이다. 나는 장소, 분리, 정체성, 함께 있지 않을 때에도 서로를 엮어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 p.92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을 겪는 내내 나는 비밀을 하나 간직하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상대를 잘못 골라 쓸데없이 쏟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나면 결국 내 옆에 ‘상남자 작가’가 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책 읽기를 매우 좋아했고 둘 다 어린 시절에 아픔을 겪은 적이 있어서 서로의 상처를 이해했다. 게다가 그는 검정 티셔츠가 잘 어울렸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 상대가 나는 아닐 테지만 그가 다시 연애를 할 거라고 말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 시내를 돌며 자신이 처음으로 머리를 깎았던 곳, 처음으로 일했던 곳, 첫 키스를 했던 집을 보여줬다. 해설 딸린 관광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어리둥절했는데, 바버라가 그게 남자들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남자들은 자신을 지리적으로 보여주기를 좋아한다나?
--- p.112~113
감사하는 마음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하늘, 바다, 연보랏빛으로 물든 큼지막한 꽃 뭉치가 여기저기 매달린 수국 덤불, 갓 구운 빵, 와인, 친구들, 또 포르투갈 사람들은 밤 9시가 되도록 저녁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했다. 어쩌면 나는 감사로 가득한 행복 속에서 기분 좋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p.143
나는 그에게 당신이 내 큰 키에 신경 쓴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그렇게 작은 키는 아니라고 말했다(물론 내가 의미한 그대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런 대화 속에 내가 꿈꿔왔던 “오, 베이비”의 순간이 있을 리가. 괜찮다. 까짓것 내가 다시 쓰면 되지 뭐. 이제 나는 혼자 낄낄거리며 열정으로 불태운 우리의 첫날밤을 떠올릴 것이고, 우리는 이런 어색한 출발을 웃어넘기게 될 것이다. 러브레터가 희망에 가득 찬 내용이 담긴 글이어야 한다면, 우리가 주고받은 이메일을 러브레터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계속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가 잘 안 맞으면 어떡하죠? 어떻게 다시 친구로 돌아가죠?” 그러면 나는 망설이는 그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니까 당신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냥 다시 곧장 친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죠?” 아버지가 이 대화를 들으셨다면 우리 둘 다에게 풍선 공장에 있는 고슴도치보다도 더 안절부절못한다며 다그쳤을 것이다.
--- p.187~188
“제겐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말했다. “돈도 없죠. 직장도 없죠. 사랑도 없죠. 이제 뭘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주방장은 다리를 쭉 뻗더니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담배를 아주 오랫동안 깊이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맥주병을 들어올렸다. “무를 위하여(Here’s to nothing).” 그가 말했다. “지금이 바로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때지요.”
--- p.196
아조레스 제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상조르제 섬에 있으면 사방에 널린 다른 섬의 풍경이 보인다. 피쿠 섬, 파이알 섬, 그라시오사 섬, 테르세이라 섬. 포르투갈 작가인 라울 브란당(Raul Brandao) 이 쓴 글 중에 아주 유명한 인용구가 하나 있다. “섬을 아름답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건너편에 있는 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늘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고 완전하게 만드는 건 우리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상상하는 일이다.
--- p.308~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