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하면, 흔히 우리는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명언, 백마를 타고 알프스 산을 넘는 장면이나 쿠데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그를 잔 다르크, 드골과 함께 가장 훌륭한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다. 테일러의 말과 같이 그는 비스마르크, 레닌, 손문처럼 세상을 바꾼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혁명을 순리적으로 이끌어,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부르봉 왕조의 부활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혁명 이념의 전도자, 홍보자 및 혁명의 우상이 되었다. 프랑스 위인 열전에서, 그는 1980년 드골에게 선두를 내주기 전까지,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과 위엄을 누려 왔다. --- p.3
나폴레옹은 역사상 군인으로서 가장 출세했고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20대에 이미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출세한 장군이 되었고,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을 거쳐 이집트까지 극적인 원정을 했고, 30대에 제1통령이자 프랑스 제일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전쟁에서 잔뼈가 굵었고, 전쟁에서 영광을 얻었으며, 전쟁에서 힘을 얻어 정권을 잡아 황제까지 오른 전쟁의 귀재였다. 그는 영국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이집트, 러시아 등과의 싸움에서 20회나 승리했다. 그는 카이사르보다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많은 전승을 했다. --- p.12
나폴레옹이 비록 전쟁을 좋아했고 전쟁터에 행복을 느꼈을지라도, 학문과 기술 개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을 가진 지성을 갖춘 군인이었다. 그의 문화 업적은 ‘나폴레옹 법전’ 편찬, 학사원 설립, 그리고 교육 개혁 즉, 제국대학 설립, 사범학교와 특수 전문학교 설립, 바칼로레아의 창설 등 많은 것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나폴레옹은 푸르크루아로 하여금 공교육 계획을 작성하게 했고, 교육개혁위헌회의 토론에 계속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한편 나폴레옹의 생애에서 그가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는 1797년 12월 25일 정치적 이유로 밀려난 카르노(Carnot) 대신에 국립 학사원(Institut National, 1795)의 기계 분과 위원에 선출되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저녁 식사 중, 라플라스(Laplace)에게 “내가 만약 총사령관이 되지 않았더라면 정밀과학에 몰두했을 것이며, 아마도 뉴턴, 갈릴레이의 길을 뒤따랐을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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