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배우면서 많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는 문학을 만끽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그 시가 주는 의미, 내 이야기 속에서 글이 해주는 역할 같은 것을 충분히 생각해볼 여유가 없더라고요. 저는 학교에서 배운 백석 시인의 시 〈여우난골족〉을 읽으며 감동을 느낄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늦은 밤 제 방에 앉아 백석 시집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때의 〈여우난골족〉을 다시 발견할 때까지요. 만약 시집을 읽을 때도 옆에서 시인의 의도를 설명해주는 누가 있었다면 아마도 저는 백석을 사랑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집 한 귀퉁이에 ‘윤동주가 사랑한 시인’이라고 적혀 있던 것처럼. 좋은 글과 시를 품을 수 있는 여유와 기회가 학생에게는 필요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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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긴긴 입시제도를 거치면서 나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학생들, 곧 내 친구들을 발견했다. 이따금 나오는 표와 점수, 숫자들을 보고서는 누구는 절망하고 누구는 꿈을 포기한다. 만약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숫자가 우리의 행복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어젯밤 전투에서 죽은 전사자의 수, 오늘 일어난 자동차 추돌사고의 사망자, 테러 희생자 같은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학습과 발달 정도를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험 점수 같은 것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한다면,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뭔가 이상함을 느껴야 마땅하지 않을까.
--- p.22
이제는 하도 익숙해져서, EBS 연계 교재로 수업을 하고 학교 교과서는 형식상으로만 배부하는 것이 학생들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사실상 같은 교재로 공부하는 것이 교육의 평등을 이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 시작이고 출발이었는지 생각해볼 때, 지금은 뭔가 잘못된 것이 맞다.
--- p.37
어른들 사회 못지않게 학생들의 조그만 사회도 치밀하게 작동한다. 학생이 주도하는 교육을 표방하는 학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줄 서기, 이권 빼앗기, 이간질, 아부를 비롯한 다양한 ‘권력’ 다툼과 편 가르기가 학생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중요한 점은, 이 미숙한 존재들 사이에는 타협과 원시안이 없다는 것이다. 한번 틀어진 교우관계는 이 정신없는 모략 속에서 점점 원수지간이 되어가고, 무리에서 배척받기 시작하면 이른바 ‘왕따’에서 헤어날 방법을 찾기 힘들다.
--- p.40
문학을 창작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성과 깊은 성찰이다. 이런 것들을 완전히 배제한 현재의 교육에서 문학의 이론적인 내용을 숙지한다고 해서 시를 쓸 수 있을까. 현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학생들이 시를 쓰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싫어하는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조만간 《1984》의 내용처럼 조금 좋은, 아주 좋은, 아주아주 좋은 따위의 표현이 문장을 지배하는 때가 올 것이다.
--- p.64
고등학생들의 독서란 고달프다. 재미있어서 읽는 게 아니라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다. 대학 입시에 필요하기 때문에, 부모님이 읽으라고 했기 때문에, 남들이 다 읽으니까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게 책을 집어 든다. 책과는 담 쌓고 지내던 친구들이 입시설명회에 다녀와서는 “저 대학에 가려면 독서활동란에 적어도 몇 권은 있어야 한대” 하며 도서관에 줄을 선다. 한참을 고르더니 진로와 맞는 책이 없다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소설책을 고른다. 그러고는 그마저도 열 페이지 남짓 읽고는 대출기간이 다 되어 반납한다.
--- p.66
자빠지는 기린처럼
우리는 청춘을 보낸다
무엇이 나를 넘어지게 하는지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하늘 위에만 시선을 두다가
그대로 넘어진다
인생이라는 것에
반환점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기린들이 넘어지는
그 순간이 아닐까
--- p.115
왜 사랑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때로는 사랑이 내게 의무를 지우고 불편을 안기고 회의를 느끼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랑한다 사랑하게 되었다 만약 사랑이 조건 없이 무엇을 주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것은 희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랑이 조건 없이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것은 자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랑이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것은 동질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란 이 모든 감정들의 복잡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를 가득 채우는 일일 테며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 일일 테며 온전히 따르는 것일 테다
--- p.149
의식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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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78
설득을 위한 글이 아닌, 한 학생의 기록들로서 이 글들이 읽히길 원한다. 때로는 감정적이고 날 선 단어가, 때로는 지나치게 관조적인 단어가 등장하더라도, 어느 학생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들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고등학생의 지치고 비좁은 시간들이 공감과 이해의 시선으로 새롭게 조명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학생이 될 것이고, 학생이며, 학생이었다.
---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