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목표
언어와 문화 간의 관계를 이해한다.
한국인의 생활환경과 삶의 조건이 한국어에 반영된 모습을 이해한다.
한국어에 반영된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표현상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생각거리
1. 다음 글을 읽어 보고 언어의 본질적 기능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말소리와 문법 그리고 어휘를 습득하는 것을 넘어선다. 하나의 언어에는 언어사회 구성원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질서와 사고방식, 행동 양식이 담겨 있다. 언어사회에서 통용되는 호칭어, 색채어, 풀 이름, 새 이름 등의 사용법을 배움으로써 사물을 구별하고, 분류하고, 질서화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언어로 만든 집에서 산다.”라고 했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질서 지워지고 인간의 의식 속에 들어온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과 정서가 흘러가는 길을 만들어 간다. 한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는 세계관, 사회관, 인간관, 문화의 틀을 공유한다.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노래한 것은 언어가 갖는 존재론적?사회적 성격을 간파한 것이다.
언어와 문화의 관계
세계에는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고, 언어들은 제각기 특유의 말소리와 문법 그리고 어휘와 같은 언어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언어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그 언어의 구조를 형성한다. 언어 구조 속에는 하나의 언어 집단이 오랜 역사를 거치며 일궈 온 경험과 생활 문화, 사고방식 등의 삶의 양식도 함께 자리 잡는다. 흔히 언어에는 그것을 사용해 온 집단의 문화가 녹아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각 언어 집단이 처한 자연 환경과 사회 환경이 서로 다른 만큼, 다양한 문화의 양식들이 수많은 언어에 반영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언어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이론을 세워 논의해 왔다. 여러 가지 설과 주장이 있지만 어떤 언어에든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언어와 문화 간의 관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내세운 것으로 ‘언어 상대성 이론’이 있다. 이는 사피어(E. Sapir)와 워프(B. L. Whorf)란 학자가 전개한 주장인데, 이 학자들의 이름을 따 사피어-워프(Sapir-Whorf) 가설이라 부른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이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으며, 언어는 해당 언어가 사용되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가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라 하더라도 공통된 문화를 공유하기도 하고, 특정 문화를 반영하는 어휘가 없는 언어라 하더라도 그것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언어 상대성 이론을 반박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의 시시비비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와 문화 간의 관계에서 무엇이 더 일차적이며 중요한 것이냐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언어가 문화의 결과이든, 문화가 언어의 결과이든 간에 그 언어 속에는 해당 언어 사용자의 생활과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점은 공통적이다.
특히, 생활환경은 언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낙타와 항상 함께 생활하는 서아시아의 유목민은 낙타와 관련된 어휘를 수십 개 갖고 있으며, 쌀농사가 주류인 필리핀의 농부는 쌀과 관련된 어휘를 많이 갖고 있다. 우리나라도 쌀농사가 주류이고 쌀이 주식이라 그런지 밥과 쌀에 관한 어휘가 많다. 밥물이 남은 정도에 따라 된밥, 진밥, 고두밥으로 구별하고, 곡식 재료에 따라 쌀밥, 보리밥, 조밥, 기장밥 등이 구별된다. 밥의 부산물로 나오는 숭늉과 누룽지란 낱말도 있다. ‘숭늉’이나 ‘누룽지’는 외국어로 번역하기도 쉽지 않다.
또 농경에는 비가 중요하다 보니 비에 대한 어휘도 많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는 비의 양이나 비가 오는 시기, 쓰임새에 따라 비를 가리키는 다양한 어휘들이 있다. ‘가루비’, ‘실비’, ‘안개비’, ‘가랑비’, ‘능개비’, ‘동이비’, ‘장대비’ 그리고 ‘못비’, ‘꿀비’, ‘단비’, ‘약비’, ‘잠비’ 등과 같은 낱말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낱말들은 우리 조상들이 비를 얼마나 세심하게 관찰했는지를 보여 준다.
한국어에 담긴 몇 가지 특징
인류학을 공부한 어느 미국인이 한국에 와 살면서 느낀 점을 얘기해 준 적이 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인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나이를 묻는 게 참 의아하더라는 말이였다.
생각해 보니 정말 한국인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나이를 묻는다. 나이를 지극히 사적(私的)인 것으로 생각하는 서구인들에게는 무례일 수 있겠다. 초면(初面)의 사람에게 나이부터 묻는 이유는 상대방과 나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다. 설정된 관계에 따라 말을 높이고 낮추는 공경(恭敬)의 어법이 우리말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어에는 이런 공경의 어법도 대상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대화든 글이든 등장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높이고 높이지 않는 것은 나이의 많고 적음뿐만 아니라 사회적 계급의 높고 낮음과 친한 정도, 친척 사이라면 서로의 항렬까지도 고려하여 결정된다. 대화나 문장에서 높임법을 사용할 경우에도 높이는 방법에 몇 가지 장치가 있다. 문장의 주어 즉 서술어의 주체를 높이는 주체 높임법도 있고(예: 할아버지께서 오십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 높임법도 있다(예: 집에 가십시오). 말하는 이가 자신을 낮추는 공손한 표현을 써서 결과적으로 상대방을 높이는 공손어법도 있다(예: 제가 하겠습니다). 심지어 주체 높임법에는 높여야 할 상대에게 딸린 것까지 높여 표현하는 간접 높임법의 형식도 있다(예: 손님은 머릿결이 좋으십니다). 이렇게 높임법의 종류가 다양한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니 한국인은 특히 높임법에 예민한 것 같다. 그 결과 “이 옷이 저 옷보다 더 좋으세요.”처럼 지나치게 높이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렇게 발달한 한국어의 높임법 체계를 보면,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 것 같다.
초면에 나이부터 묻는 한국인에게는 외국인이 보기에 특별한 어법이 또 하나 있다. ‘나’의 복수형인 ‘우리’의 용법이 그것이다. 한국인은 외국어에서 ‘나’를 써야 할 자리에 ‘우리’를 자주 쓴다. ‘우리 아버지(my farther)’, ‘우리나라(my country)’에, 심지어 ‘우리 아내(my wife)’나 ‘우리 남편(my husband)’도 쓴다. 신기하게도 ‘내 아버지’나 ‘내 어머니’란 말은 잘 안 쓴다. 이런 ‘우리’와 관련된 언어 습관은 가족이나 국가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 공유하는 것으로 생각해 온 한국인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좁혀서 보면 한 마을에 한 씨족이 모여 살던 집성촌 시대 혹은 대가족 시대의 생활 문화가 한국어에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흔히 한국어는 느낌을 살려 번역하기 어려운 언어라고 한다. 『토지』와 같은 소설에서 양반과 상민 사이에 오고 가는 높임과 낮춤의 말맛을 영어로 바꾼다면, 적어도 한국인의 기준에서는 참으로 느낌이 단순해진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my family’가 되는 것도 왠지 모르게 섭섭하다.
한국어가 이렇게 번역하기 어려운 언어가 된 것은 앞서 얘기한 복잡한 높임법이나 남다른 대명사 체계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하게 발달한 감각어 체계도 우리말만의 특별함을 나타낸다. 아래의 낱말들을 한번 읽어 보라.
찔금찔금, 죽죽, 쫙쫙, 줄줄, 주룩주룩, 뚝뚝, 후둑후둑, 후드득후드득
모두 비가 내리는 모습을 묘사한 우리말이다. 아무리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단번에 이해하지는 못할 표현들이다. 이 낱말들은 비의 양과 내리는 소리의 차이를 미묘하게 나타내고 있다. 언어에는 그 언어 사용자의 문화가 녹아 있다고 하였다. 이런 감각적인 표현들 또한 한국의 문화가 깃든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타 문화권에 바탕을 둔 언어로는 한국인의 정서를 충분히 표현해 낼 수 없다. 이황, 정철, 윤선도 같은 학자가 한문이 아닌 우리말로 시조와 가사를 지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 고유의 어휘에는 섬세한 느낌과 감동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의성어나 의태어 그리고 감각어가 풍부하다. 어떤 외국어로도 ‘후둑후둑’과 ‘후드득후드득’의 차이를 맛깔나게 표현해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감각어 중에서 색채어의 예를 들어 보자. 한국어에서 고유어로 된 색채어는 다섯 색밖에 없다. ‘빨강, 노랑, 파랑, 하양, 검정’의 다섯 가지 낱말을 뺀 나머지 색채어는 한자어거나 외래어이다. 그런데 이런 고유어계 색채어에는 한자어나 외래어계 색채어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 예를 들어 ‘빨갛다’는 ‘새빨갛다’, ‘시뻘겋다’, ‘검붉다’, ‘불그레하다’, ‘불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와 같이 미묘한 색감의 차이를 표현하는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한자어나 외래어계 색채어는 고유어와 달리 색채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다. 예를 들어 ‘보라색’의 ‘보라’는 몽고어에 기원을 둔 색채어이다. 혹시 ‘보르스름하다’나 ‘보랗다’와 같은 표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표현이 없는 것은 이 낱말이 밖에서 들어온 말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설명할 때 이런 감각어들을 어떻게 설명할까를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실 감각어만 번역하기 어렵겠는가? 오랜 역사와 문화를 함께 엮어 온 한 민족의 언어를 이질적인 문화에 뿌리를 둔 다른 민족의 언어로 바꾸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한국어에는 한국인의 다양한 문화가 담겨 있다. 인간은 언어라는 그릇에 생각과 경험, 물질과 문명 세계를 담아 왔다. ‘언어’, ‘인간’ 그리고 언어가 표상하는 ‘사상(事象)’이라는 세 가지 요소는 한 덩어리로 상호 작용하며 인류 문명을 이룩해 왔다. 한국인이 인류 문명의 진보에 이바지하는 길은 한국어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한국어를 통한 창의적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한국 문화의 격을 높이는 데 있다.
--- 「1장 한국어에 담긴 한국인의 언어문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