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오래전 우리의 짧은 입맞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믿지 않는 일이 당신과 가장 가까운 입술 위에서 일어나던, 그랬던 나날들처럼 말이다. --- p.9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 p.47
그녀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아버지가 점퍼 속에든 편지 한구절을 조용히 읊는다. 안녕하세요. 가늠할 수 없는 안부들을 여쭙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안녕 하고 물으면, 안녕 하고 대답하는 인사 뒤의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 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 p.82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사랑이 ‘나는’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래도 나는’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나는 한번 더 ‘나는’이라고 말한 뒤 넘어지는 사람,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는 사람,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 고 처음부터 다시 말하는 사람이다. --- p.150
내가 편의점에 갈 때마다 어떤 안심이 드는 건, 편의점에서 물건이 아니라 일상을 구매한다는 실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닐봉지를 흔들며 귀가할 때 나는 궁핍한 자취생도, 적적한 독거인도 무엇도 아닌 평범한 소비자이자 서울시민이 된다. --- p.222
이것은 당신과 아무 상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수만가지 일들이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당신이 절대 가볼 리 없는 지방 관광도시의 고장난 공중전화와 당신, 스타크래프트 챔피언과 당신, 고생대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빛도 산소도 없는 곳에 사는 지옥의 오징어와 당신, 당신과 당신 사이의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