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은 문헌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첫 관문(portal)이자 도서관자료에 내재된 지적자산을 이용자에게 효율적으로 연결해주는 고리입니다. 자료와 이용자의 연결고리가 목록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편목규칙이나 MARC, 사용자 인터페이스 같은 것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지엽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매가 맺히는 곁가지에 가려져 사람들이 원줄기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 그동안 사서들은 형식에 치우치고 기술방법에 매몰된 나머지 목록이 추구해야 할 본질적 가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소홀했던 게 사실입니다. 인터넷 탐색만으로 얻기 불가능한 ‘+α’의 그 무언가를 도서관목록이 제시해주기 위해서라도 파니치, 커터, 루베츠키 등의 위대한 편목학자들이 설파했던 목록의 철학과 원리를 끊임없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p.140
모름지기 사서는 도서관 이용자가 원하는 자료를 모두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어 기뻐할 때 보람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술편목만으로는 ‘줄기세포’라는 키워드로 검색이 불가능했던 『과학수다』라는 자료에 653 필드를 통해 색인어를 입력함으로써 주제명검색이 가능해졌을 때, 무심코 ‘줄기세포’로 검색한 어느 청소년이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열심히 공부하여 나중에 훌륭한 줄기세포 연구자가 되어 노벨의학상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653 필드의 나비효과로 노벨상이라니, 너무 과장이 심한 게 아니냐구요? 헛웃음 나올 일이 절대 아닙니다. 칼 세이건은 어릴 적 도서관에서 별에 관한 책을 읽고 천문학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하인리히 슐리만은 『일리아스』를 읽고 훗날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였습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해리엇 비처 스토가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미국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나아가 역사를 뒤바꾼 사례는 부지기수입니다. 653 필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직무유기라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반드시 기억해두십시오. 내가 작성한 목록, 내가 입력한 비통제 색인어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이, 국가의 미래가, 나아가 인류의 역사가 바뀔 수 있음을. 자료조직은 그만큼?숭고한 업무입니다. --- p.277
표목필드에는 ‘법상’과 ‘법정’이라는 법명(法名)만 기술하기 때문에 이용자가 ‘법상 스님’이나 ‘법정 스님’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아래 자료들은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사서는 어떤 자료를 간절히 원하는 이용자에게 그 자료를 연결해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스님’이라는 칭호가 나타나 있지 않은 자료라 할지라도 십중일이(十中一二)의 이용자는 ‘법륜 스님’, ‘혜민 스님’과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는 실정입니다. 설령 백중일이(百中一二)라 해도 사서에게는 그 자료를 연결해줄 중책이 있습니다. 원칙을 준수했다는 이유만으로 ‘스님’이라는 단 두 글자 때문에 소장자료가 비소장자료로 나타나는 현상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는 건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손을 써야 할까요?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게 로컬필드입니다. --- p.305
형식과 사용방법에 치우친 탓에 MARC이 편목규칙과 더불어 기능주의적 사서교육의 주범(?)으로 곧잘 지목되기도 하나 그렇다고 아직까지는 함부로 업신여길 수 없는 애증의 대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과연 10년, 20년이 흐른 뒤에도 도서관에서는 MARC을 계속 사용하고 있을까요?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목록의 발달사를 돌아볼 때 편목규칙이 획기적으로 간소화되지 않는 이상 MARC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10년 후, 20년 후까지도 존속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지피지기, 즉 적(?)을 알고 나도 알아야 MARC을 넘어서는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잡하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MARC을 공부해야 할 까닭입니다. --- p.317
오랜 학습을 통해 KCR을 숙지하고 KORMARC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이지만 실전(?)에서 막상 어떻게 편목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일말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다소 엉성하지만 KORMARC 입력을 위한 일종의 자율연수 도구를 만들어보았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실전에서 MARC 입력과정을 익힐 수 없는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없는 것보다는 지푸라기라도 몇 가닥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다만 지푸라기처럼 엉성한 튜토리얼을 과신해서는 곤란합니다. 이것은 편목업무를 익히기 위한 하나의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수영이나 자전거를 배울 때 물에 뜰 수 있게 되거나 자전거 타기에 능숙해지면 부력보조용품이나 보조바퀴를 스스로 제거하듯이, MARC 입력에 숙련된 이후에는 가급적 튜토리얼에 의존하지 말 것을 권장합니다. --- p.374
378.9와 598.6은 혼동되기 쉬운 주제이기 때문에 동일한 자료에 대해 도서관마다 서로 다르게 분류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분류하기 어렵다면 “누가 이용할 자료인가?”를 자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즉, 학부모를 위한 자료는 생활과학(590) → 육아(598) → 가정 내에서의 학습(598.6)에 분류하고, 교사와 예비교사를 위한 자료는 교육학(370) 아래에 분류하면 됩니다. ‘이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여 그것이 적용될 분야에 분류하라’는 분류의 기본원칙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 p.449
국내 공공도서관에서는 대체로 『신데렐라』를 샤를 페로의 판본을 개작한 것은 프랑스문학(863)에, 그림형제의 판본을 개작한 것은 독일문학(853)에 분류하고 있으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판본은 영미문학(843)에 분류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모든 신데렐라 이야기가 서가상에서 분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경우 KDC 분류규정을 따르자면 앙투안 갈랑(Antoine Galland)의 프랑스어 번역본(1704-1717)이나 리차드 프란시스 버튼(Richard Francis Burton)의 영어 번역본(1885)은 민속문학(388.118)에 분류하고, 이를 아동용으로 개작한 『알라딘과 요술램프』, 『신드바드의 모험』 등은 문학으로 분류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도서관에서는 모두 아랍(아라비아)문학(897.7)으로 오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류규정과는 무관하게 결과적으로는 모든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가 서가상에서 군집됨을 의미합니다. --- p.452
서점에 가면 어려운 학문이나 주제 분야일수록 ‘쉽게 배우는’이라는 관제를 가진 입문서가 다종다양하게 발간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왜 우리 분야에는 ‘for dummies’ 시리즈 같은 초심자를 위한 입문서가 없었을까요? 왜 쉽게 배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까요? 자못 궁금했습니다. 궁리 끝에 ‘아무나 문헌정보학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진입장벽을 높이기 위함’일 것이라는.
많은 이들이 사서의 위상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진입장벽을 낮추지 않아야 한다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대문을 활짝 개방하더라도 기초체력을 튼튼히 하여 대외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면 되었지 사서의 품위가 손상된다거나 직업적 위상이 저하될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일부에서 우려하는 시쳇말로 밥그릇(?) 뺏길 일도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국외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소상히 알려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라면, 오히려 그럴수록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문헌정보학에 쉽게 다가설 수 있게끔 해주어야 합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도서관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과감히 문턱을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 시작점은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서적을 출판하는 일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부디 여러모로 부족한 이 책이 문헌정보학의 ‘대중화’와 ‘저변 확대’를 싹틔우는 한 톨의 씨앗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p.485, 「제2권을 마무리하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