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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

: 마흔에 다시 읽는 동양고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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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1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300쪽 | 404g | 151*222*20mm
ISBN13 9788950946210
ISBN10 8950946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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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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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지락」을 보면 장자의 아내가 죽자 친구 혜자가 장자에게 문상을 온 이야기가 나온다. 혜자가 문상을 하러 왔을 때 장자는 술동이를 북처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 혜자는 장자에게 반평생을 함께한 아내가 떠났는데 노래를 부르다니 좀 심하지 않은가”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장자는 자신도 처음에는 슬펐지만 삶과 죽음의 유래를 따져 보니 슬픔을 멈추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어슴푸레하고 흐릿한 속에 뒤섞여 있다가 한 차례 변하여 기氣가 생기고, 기가 다시 변해서 형체가 나타나고 형체가 다시 변해서 생명이 생겨났다가, 지금 또 변해서 죽은 것이다. 이는 마치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네 계절이 번갈아 운행하는 것과 같다.”(雜乎芒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pp.27-28

쫓기는 사람일수록 시계를 더 자주 들여다본다. 쫓기는 때일수록 상황에 따라 시간이 아주 빨리 또는 아주 느리게 가는 듯하다. 시간은 객관적인 간격으로 흘러가지만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태에 따라 시간의 속도를 달리 느낀다. 공자는 나이의 제약이 있는 데다 기회의 문도 닫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토록 느긋할 수 있었을까? 그는 시간의 사슬에서 놓여난 자신의 심경을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발분망식 낙이망우 부지로지장지운이).’라는 열여섯 글자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공자에게는 두 개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뭔가를 알고자 하는 배움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공자는 알고자 하지만 모를 때 자신에게 분노를 느끼며 스스로 채찍질하게 되는데, 이때 시간은 공자의 몸에서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밥 먹는 것도 잊고 몸으로 인한 근심도 잊어서 노화의 도래마저 눈치채지 못한다. 즉, 공자는 사람으로서 자연의 시간을 살면서도 그것의 제약에 눌리지 않고 늘 발분의 시간으로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다. ---pp.30-31

서거정은 성, 취미, 문장 등을 소재로 하여『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라는 유쾌한 글을 지었는데, 그중 경주 기생과 서울 소년 사이의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서울 소년이 경주에 갔다가 그곳에서 예쁜 관기를 만나 사귀게 되었다. (…) 그러다 시간이 흘러 소년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별을 앞두고 관기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자 소년은 지갑을 탈탈 털어서 모든 것을 주었다. 하지만 관기는 그것을 사양하며 절신지물切身之物, 즉 몸에서 잘라 낸 물건을 요구했다.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지만 관기가 그것도 싫다 하자 소년은 결국 앞니를 분질러서 관기에게 주고 이별했다. 서울에 돌아온 뒤 소년은 관기의 소식이 궁금해서 경주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그녀의 사정을 묻곤 했다. 그런데 때마침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 관기는 소년과 헤어지자마자 다른 남자와 사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소년은 종을 보내서 자신이 분질러 준 앞니를 찾아오게 했다. 종이 관기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말하니 관기가 크게 웃으면서 “백정에게 살상을 경계하라 하고 관기더러 예를 지키라고 하는 셈이니 소년은 바보가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로구나!”라며 타박을 주었다.(屠門戒殺, 娼家責禮, 非愚則妄!) 그러고서는 이를 찾아가라며 자루 하나를 툭 던지는데 그 속에는 그녀가 평생 남자들로부터 받은 이로 가득 차 있었다. ---p.77

초발심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시작하게 하는 힘이다. 달리 말해 시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내’가 행동으로 보여 주는 시작을 보겠지만‘나’는 그렇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전의 결심을 알고 있다. 또 초발심은 우리가 시작했던 일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주저앉더라도 새롭게 시작하도록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설경구(영호 역)가 주연했던 영화〈박하사탕〉(1999)은 마지막 장면의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대사로 유명하다. 박하사탕을 입에 넣으면 텁텁한 입안이 갑자기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영호에게도 박하사탕과 같은 순임(문소리 분)을 사랑했던 순수한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호는 살아가면서 자신을 더 이상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좀 가볍게 생각해 보자. 게임을 하다가 점수가 뜻대로 나오지 않으면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하지 않고 리셋reset 키를 눌러서 리플레이replay를 하지 않는가? 다시 돌아가려는 영호와 리셋 키를 누르는 우리 모두 초발심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pp.15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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