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공연 예술을 공부했다. 현재 시사주간지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교육 관련 기사를 쓰면서 청소년 평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글을 쓰고 있으며, 저서로는 『오늘 우리는 간사이로 떠난다』(경향신문사 출판국)가 있다.
디즈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니메이션 제작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디즈니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리고 뚜벅뚜벅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났고, 성공했다고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찾아 나섰다. ---「작가의 말」
로이 형의 말에도 엄해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월트는 눈물을 흘렸다. “형, 혹시 내가 주워 온 자식이 아닐까? 아버지는 왜 이렇게 나를 미워하는 걸까? 옆에서 어머니는 말려 주지도 않고…….” “별소리를 다 한다. 그만 자는 게 좋겠어.” 월트는 어머니보다 형 로이에게 많은 위안을 받았다. 월트는 로이를 꼭 껴안고 잠들곤 했다. ---p. 17
“앨리스 시리즈가 수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계약을 해지해야겠습니다.” “계약 파기라니요? 현재 일이 잘 진행되어 가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세요.” 디즈니는 계약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다. 후원자였던 마거릿 윙클러와의 사이가 왜 그렇게 갑자기 나빠진 걸까. 디즈니는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p. 46
제작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나면서 제작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은행에서는 더 이상 대출이 어렵다고 경고했다. 제작진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디즈니 씨, 저희 은행에서 대출은 더 이상 어렵습니다.” “그래도 직원들 월급은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작품만 마무리되면 바로 갚을 수 있습니다.” “정 그렇다면 대출 여부는 지금까지 했던 작업을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스튜디오를 담보로 돈을 빌려 준 은행에서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다. ---p. 88
1947년 9월 미국 의회는 공산주의자 영화인을 조사하는 데에 증인 43명을 불렀다. 19명이 제출을 거부했지만 디즈니는 기꺼이 증인이 되었다. 그는 이제 할리우드의 우파인 맥기니스, 휴지 등과 함께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1947년 내내 디즈니는 연맹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좌파 척결에 앞장섰다. 1947년 10월 24일, 디즈니는 국회의사당 하원 코커스 룸에 들어섰다. “디즈니 씨, 당신의 스튜디오에 공산주의자나 파시스트가 있습니까?” ---p. 121
“영화〈메리 포핀스〉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디즈니라는 제작자의 명예를 회복했다는 것이 저에게는 더욱 소중했습니다.” 정치권에서도 디즈니를 수없이 유혹했다. 하지만 디즈니의 대답은 간결하고 분명했다. “디즈니랜드의 왕으로 살 수 있는데, 왜 주지사나 국회의원이 되겠습니까?” 디즈니는 지금까지 자신이 이루어 놓은 삶에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