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 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p.13
당신은 아직도 그날 밤을 기억한다. 희영이 써온 긴 글을 처음으로 읽고 들었던 순간의 충격을. 그곳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차갑게 언 발의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글을 읽고 있던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되어 가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 p.24
당신은 지나가는 말로라도 희영에게 칭찬을 한 적이 없었다. 희영이 지닌 통찰력, 글쓰기 능력, 절제력을 지니고 자기 삶을 운영하는 능력에 대해서. 희영이 얼마나 드문 사람인지, 어떤 의미에서 강한 사람인지 이야기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었는데도. 당신에게 그럴 주제가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당신의 초라함이 더 분명해지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 p.31
희영은 차분한 표정으로 정윤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정윤의 말에 어떤 반박을 할지 궁금했지만 희영은 알겠다는 대답만 하고 말을 잇지 않았다. 그다음 회의 자리에서 희영은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자신이 쓰고자 했던 주제를 폐기했다. --- p.49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