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면 안도하고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겁났다던 엄마는 그런 세월을 살아오면서 알아차린 것이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내다보면 미리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 걸음, 손에 집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도 말끔해진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고.
(정희재, ‘눈이 게으른 거란다’ 중에서)
“부딪히면서 배워요.”
1, 2초간 숨이 멎었다. 아, 그것 참 멋진 말이로구나! 그때 나는 마흔이 목전이었다. 삶의 윤곽을 알아 버린 것 같았고, 그만큼 세상은 덜 흥미로웠다. 나 스스로 얼마나 모자란 존재인지를 잊었다. 그래서 지구의 머나먼 끝까지 다녀와야 절절한 교훈 하나쯤 가슴에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그런 내게 가르쳤다.
‘당신 바로 곁에 책상이 있어요. 부딪히면서 배워요. 배운다는 건 그런 거예요. 온몸을 내던지는 것.’ (오소희, ‘부딪히면서 배워요’ 중에서)
여전히 ‘아님 말고’는 내가 새로운 어떤 사업을 시도하거나 아리송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매우 유효한 주문이 되고 있다. 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만사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면 특별히 심각할 것도, 무거울 것도 없는 것 같다. 극히 예외의 경우는 있겠지만 두 개의 선택 중 잘못된 하나를 골랐다고 해서 그것이 전체 인생의 결정적인 판도를 바꿔 놓는 것 같지도 않다.
일단 해보고, 해보면서 더러는 깨져 보고, 깨져 보면서 때로는 후회도 해보고, 그렇게 움직일 때 느낌표도, 마침표도 나오는 것이 인생이라 믿는다. (윤용인, ‘아님 말고’ 중에서)
“지금은 서툴러도 괜찮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선생님을 보았다.
“겨우 스무 살인데, 뭐.”
스무 살의 슬픔은 당연한 것이라고, 스무 살의 방황은 오히려 고마운 흔들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 그렇다. 겨우 몇 번의 실패로 절망하기는 이르다. 포기하기는 아깝다. 삶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겨우 시작이다. 인생의 간이역에 설 때마다 매 순간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송정림, ‘지금은 서툴러도 괜찮아’ 중에서)
아득하기만 한데 뭐가 된단 말인가! 하지만 이 모순적인 문장은 지난한 삶의 순간마다 나를 일어서게 했다. (…) 세상에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은 작은 무대가 전부였고, 내 인생의 미래도 배우로서의 희망도 찾기 어려웠다. 그저 나는 아득한 그 어딘가를 향해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알았다. 아득한 것은 손을 놓아 버리는 체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아득하기에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면서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음을.
(이재용, ‘아득하면 되리라’ 중에서)
한 사람이 한 가지를 이루면 세상의 모든 말이 다 내 말이 되어 다가옵니다. 자신의 말이 기쁜 노래가 될 때까지 우리는 세상의 말들을 내 말로 삼아 삶을 귀하고 소중하게 가꾸며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 견디고 기다리고 마침내 이겨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럴 때만 한마디의 말이 나를 바꾸는 말이 될 것입니다.
(김용택, ‘사람 사는 일 어느 것 하나 버릴 일 없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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