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역사학자들은 단순히 인간의 이동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인간과 더불어 다양한 상품과 물건, 사상, 종교, 그리고 전염병이 이동한 루트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인류 역사 속에서 발생한 수많은 현상과 변화, 이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와 교훈까지 끊임없이 성찰한다. 따라서 인간의 이동은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는 20세기 이후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나타난 현대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호모사피엔스가 전 지구적으로 이동하면서부터 이미 글로벌 네트워크는 형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글로벌 네트워크의 범위는 오늘날보다 훨씬 좁았다. 그럼에도 다양한 규모의 글로벌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과 함께 이동한 여러 요소를 살펴보는 것은 인류 역사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틀을 제공해준다. _7~8쪽
몽골제국의 넓은 영토와 체계적인 도로는 교역이 활발해지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몽골제국의 도로망은 의도치 않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는데, 바로 전염병의 확산이었다. 14세기 동안에 아프로-유라시아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은 흑사병이었다. 흔히 ‘페스트’라고 부르는 흑사병은 원래 중국 남서부 지역의 윈난성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던 풍토병이었다. 쥐를 숙주 동물로 삼아 기생하는 벼룩이 사람에게 흑사병을 옮기는데, 발열과 통증, 림프샘 부종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몽골제국이 윈난성을 정복하면서 흑사병은 자연스럽게 몽골제국 내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상인들의 교역이나 활발한 정복 전쟁과 함께 몽골제국 근처의 여러 지역으로 흑사병이 퍼졌다. _53쪽
20세기 이후 황열병은 아프리카의 풍토병이며, 강제 이주한 아프리카 원주민과 함께 아메리카로 옮겨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5세기 말 콜럼버스를 비롯한 유럽인이 건너가면서 그들과 함께 아프로-유라시아의 다양한 전염병도 함께 건너갔다. 그 결과,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아프로-유라시아로부터 이동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말 그대로 아메리카 원주민이 멸종한 것이다. 전염병 덕분에 유럽인은 쉽게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정복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의 은과 금, 사탕수수와 커피, 면화 등을 재배해 상품화하고자 새로운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황금해안에 사는 수많은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아메리카로 데려왔다. 이들과 함께 황열병도 함께 이동하면서 아메리카에 살던 유럽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_105쪽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염병인 결핵은 21세기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핵은 산업혁명 이후 산업 네트워크의 형성과 확산 속에서 장시간의 노동과 불균형한 식사로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결핵은 빈부 격차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전염병이다.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오늘날 결핵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지역은 인도와 아프리카라는 사실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결핵은 더 이상 한 지역이나 국가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전염병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토대로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핵을 비롯한 치명적인 전염병은 결국 전 세계가 어떻게 통제하고 예방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_131쪽
유럽에서는 프랑스 남서쪽에 있는 보르도에서 처음 ‘1918년 인플루엔자’가 발생했다. 이 지역은 미국해외파견군이 도착하는 여러 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1918년 인플루엔자’의 발생 기원에 관해 여러 학자가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미국에서 처음 발생한 뒤 병력 이동과 더불어 유럽으로 확산되었다고 믿고 있다. 1918년 가을에는 매달 25만 명 이상의 해외 파견군이 유럽으로 이동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독일군과 전투를 벌인 서부전선으로 파병되었다. 결국 서부전선에서도 ‘1918년 인플루엔자’가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전염병의 원인을 밝히지 못해 별다른 치료나 조처를 취할 수 없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환자의 격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18년 인플루엔자’는 서부전선 전체로 퍼졌다. 당시 환자 수는 약 7,000명 정도였다. 뫼즈-아르곤전투에서 연합군은 최후 공세를 펼쳤는데, 이때 전투 사상자는 약 90명이었다. 반면, ‘1918년 인플루엔자’ 사망자는 450명 정도로 다섯 배 이상 많았다. _166~167쪽
그렇다면 왜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백신을 만들어서 에이즈를 치료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가 매우 빠른 속도로 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증식에 불리한 조건이나 환경이 되면 증식을 멈추고 인간의 몸속에 오랫동안 잠복한다. 바이러스가 진화하기 때문에 에이즈 항생제 투약도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처럼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하는 항생제를 사용하는 경우, 바이러스는 이를 피해 더욱 오랫동안 인간의 몸에 기생하려고 한다. 이제 에이즈는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아니라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장기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질병이 되었다. 과거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 상황일지 모르지만, 이는 지구상의 일부 지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항생제 투여로 에이즈를 관리할 수 있으나 가난한 나라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_203쪽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한 지역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전 지구적으로 발생한 전염병이 한 지역에만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도 있다. 따라서 이제 전염병은 하나의 지역이나 국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특히 오랜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처럼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지역이나 국가에서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이를 치료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전염병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고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대사회의 상호 관련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상호 관련성은 현대사회의 본질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전염병을 극복하고 통제하려면 전 지구적인 협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