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배우려면 여의도에 있는 방송작가교육원에 가야 한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희경도, 나의 라이벌 임성한도 그 교육원 출신이란다. 그리하여 없는 돈을 닥닥 긁어모아 교육원에 등록했다. (…)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교탁 앞에 서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수업의 시작을 알렸다.
“여러분이 여태껏 써온 글이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겠지만요. 사실은 거지보따리 안에 든 보잘것없는 쓰레기입니다. 여러분, 거지보따리를 버리고 이제부터 새로 시작해봅시다.” 뭐야, 재수 없지만 좀 멋있는데? 나는 내 주제를 화끈하게 일깨워준 그녀를 믿고 따라가보기로 결심했다. (…) 하여튼, 여러분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준다나 뭐라나 하면서 문가에 앉은 학생에게 “밖으로 소리가 새나갈 수 있으니까 문 좀 닫아봐요”라고 명했다.
철컹, 문이 닫히자 그녀가 교탁 앞에 앉은 나에게 다가왔다. 퍽! 퍽! 퍽! 눈앞이 캄캄해짐과 동시에 정수리가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뭐지? 어, 그러니까 지금 저 여자가 내 머리를 때린 거야? 갑자기?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드라마 작가 한번 되려다가」중에서
“작가님, 작가님! 우리 이번에 김승옥 선생님 책 하게 됐는데요. 네, 진짜요! 근데 내 주변 사람들은 이걸 아무도 이해 못해. 말해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 작가님은 내 기분 뭔지 알죠? 그쵸?” 덕후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녀가 오두방정을 떨면 떨수록 그 향기는 더욱 짙어져만 갔다. 그제야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퍼즐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민음사에서 바캉스 시즌에 출간한 ‘워터프루프 북’을 일부러 물에 푹 담그고서는 “진짜 안 젖네?” 하며 까르르 웃던, 대표가 자기 책꽂이에 꽂힌 책을 허락도 없이 가져가면 “대표님, 제 책 맘대로 건들지 마세요” 하며 정색하던, 언젠가 아주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저는요. 나중에 제가 직접 글 쓰고 편집까지 하게 되면요. 대충 막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그리구요. 절대로 우리 출판사에서는 출간 안 할 거예요” 하며 대표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 그렇다. 이슬이는 덕후였던 것이다. 편집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책 덕후.
---「편집자 코스프레를 한 어느 책덕후」중에서
모든 책에서 공통으로 조언하길, 말하듯이 쓰되 단문을 사용하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글을 써보았다. 과연 쉽게 읽히기는 하였으나 경상도 남자의 일기장처럼 영 재미가 없었다. 버리자. 나에게 맞지 않는 조언은 과감히 버려버리자. (…) 그렇게 한동안, 쉽고 재미있는 글의 길라잡이를 찾아 헤매던 나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를 듣다가 무릎을 쳤다. 이거다, 이거야! 장기하의 노래는 말 같기도 하고 글 같기도 했다. 가사는 주로 짧았지만 때로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길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절대 헐떡이는 법이 없었다. 적당한 위치에서 살짝살짝 끊어 부르며 숨 쉴 틈을 주었기 때문이다. 짧은 가사와 긴 가사가 어우러져 리듬을 만들어내니 듣기에 지루하지도 않았다.
장기하를 접한 이후로 나는, 내 글을 글이 아닌 노래라 생각하며 쓴다. 그리하여 다 쓰고 난 후에는 노래를 부르듯 글을 불러 본다. 눈으로 볼 때는 매끄러워 보였던 문장도 소리 내어 읽으면 걸리는 것투성이다. 글을 읽다가 발음이 걸리면 부드럽게 고치고, 문장의 리듬이 마음에 걸리면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합쳐보기도 했다가 한 문장을 두 문장으로 쪼개보기도 하며 적절한 리듬을 찾아낸다.
---「그 많은 글쓰기 책을 읽고 내린 결론」중에서
캐릭터 연구 워크숍을 수강할 때 고재귀 선생님께서는 내 과제에 이런 평을 해주셨다. “아주 오래전부터 습작을 해온 사람이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는 그런 척하고 잠자코 앉아 있었지만 사실은 블로그에 일기를 씨불인 것 외에는 별다른 습작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이나 뜨끔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흐른 뒤에 알게 되었다. 소설이나 시를 쓰겠다는 굳은 마음가짐으로 써내려간 글만이 글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 일기를 소설처럼 쓴다면 그게 소설이 되고, 내 일기를 시처럼 쓴다면 그게 바로 시가 된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내가 써온 일기 모두가 습작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끄적거리는 일기도 습작이 될까」중에서
나에게 지면을 내어주신 조선일보 부장님께서 무명작가인 나를 알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옛날 옛날 한 옛날, 인적 없는 나의 개똥밭, 아니 아니 나의 블로그에 어찌어찌 흘러들어와 나의 똥을, 아니 아니 나의 글을 재미나게 구경하셨단다. 이 정도 글이면 책도 냈겠다 싶어 찾아보았더니만 웬 에세이집도 한 권 냈더란다. 기회가 되면 청탁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나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내셨단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사로 배송된 신간을 우연히 집어 들었는데 표지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고 혹시 이 이주윤이 내가 아는 이주윤인가, 맞네 맞네 이 이주윤이 그 이주윤 맞네, 때마침 지면도 비는데 청탁 한번 해봐야겠다, 하여 인연이 닿게 된 것이다. 신기하고도 묘한 일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좀 재수 없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운이다, 운.
---「나는 어쩌다 신문 연재 기회를 얻게 되었나」중에서
꼬박 1년을 투자해 쓴 첫 책으로 내가 손에 쥐게 된 돈은 250만 원이 채 안 된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녕 몰랐었다. (…) 책의 정가는 12,500원이었고, 책 한 권이 팔릴 때마다 나는 인세 10%에 해당하는 1,250원을 가져가기로 계약을 했다. (…) 대부분의 저자가 이 정도 조건으로 계약을 한다. 아니꼬우면 많이 팔릴 만한 글을 써서 책을 많이 팔아먹은 다음 그만큼 많은 돈을 가져가면 된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글을 써서 돈 버는 일은 요리조리 따져보아도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이 일을 할 때만이 내가 나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내면 얼마를 벌 수 있을까」중에서
“제가 지인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도대체 큰 출판사가 어디예요? 문동, 창비, 웅진, 다산, 위즈덤, 랜덤, 민음사, 김영사, 뭐 이런 데? 진짜로 그런 데서 책을 내야 잘 팔리는 거예요?” 나의 개소리를 진지하게 듣던 편집자님이 핸드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내 눈앞에 화면을 들이밀었다. YES24의 에세이 베스트 순위였다. “보세요, 작가님. 에세이 베스트 10위권 안에 대형 출판사가 몇 개나 있는지.”
과연 알 만한 출판사보다 모르는 출판사가 훨씬 많았다. 편집자님의 이어지는 말씀은 이러했다. 마케팅에 큰돈 들이기 어려운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것도 위험부담이 큰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출판사와 계약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대형 출판사에서는 한 달에만 30여 종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중 한두 권에만 마케팅비를 쏟아붓는다고. 이른바 선택과 집중이란 거다. 그러니 대다수의 신간들은 변변한 마케팅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끝난다고. 어쩌면 작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다고.
---「대형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 성공 확률이 높을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