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한 후 경희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 객원교수를 거쳐, 경북대학교, 경희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한림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프랑스 제3공화정 연구》(1976), 《현대역사사상》(1978), 《전환의 역사》(1978), 《현대사의 길목에서》(1978), 《민중시대의 논리》(1979),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1980),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1991, 《자유주의의 역사》의 초판본), 《함석헌 다시 읽기》(2002)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현대세계사》(1964), 《역사의 연구》(축약본 전2권)(1976), 《서구문화와 종교》(1977) 등이 있다. 대표 저서 《자유주의의 원리와 역사》는 1992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을 수상했다.
제3신분의 혈세로 만들어진 베르사유 궁정 삼부회 대의원 1,214명이 1789년 5월 초 프랑스 왕국의 방방곡곡 원근 각지에서 베르사유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베르사유는 물론이고 파리도 처음 보는 시골뜨기 유지들이었다. 특히 제3신분 대의원들이 그랬다. 그들은 우선 베르사유 궁정의 호사함에 놀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베르사유 궁정이 넓고 아름답고 호화롭다는 말은 들었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궁정은 실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호사와 장대의 극치였다. …… 베르사유의 장대하고 호사한 궁정과 궁중 생활의 비용은 어디서 나왔던가? 바로 제3신분의 혈세가 아닌가! 국가재정 파탄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그들은 이제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이다. 삼부회의 회의 장소를 파리로 하지 않고 베르사유로 한 것은 왕이 그토록 즐기던 사냥의 편의를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왕의 첫째 실책이었다. --pp.68~69 중에서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등장하는 상퀼로트 8월 10일 사건은 파리 시의회 즉 파리 코뮌을 프랑스의 실권자로 만들었다.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요구대로 왕권의 일시 정지를 선언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 국회인 국민공회의 소집을 가결했다. 왕권은 우선 잠정적으로 정지되었지만 결국 영원히 폐지될 터였다. 왕은 탕플에 유폐되었다. 그는 거기서 다섯 달을 더 살다가 처형되고 만다. 라파예트는 8월 10일 사건에 반격을 시도하여 일선 군대를 파리로 회군시키려다 실패하여 벨기에로 도망했다. 왕정을 수호하여 입헌군주 체제의 테두리에서 혁명을 성취하려던 사람들은 이제 라파예트와 함께 몰락하였다. 8월 10일 사건의 주동 세력은 온건한 부르조아가 아니라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과 영세 상인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혁명을 한결 더 과격하게 만든다. 이들은 귀족이 입는 퀼로트라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여 상퀼로트라 불렸는데, 이제 이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 --pp.126~127 중에서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돌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무장 군인이 의사당을 점령하였다. 총검이 500인회 의원들을 쫓아냈다. 저녁 7시경 원로원은 앞서 500인회가 결의한 나폴레옹의 추방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통령정부의 조직을 공포하였다. 총재정부는 폐지되고 새 통령들에게 행정권이 위임되었다. 루시앵은 30~40명의 500인회 의원들을 긁어 모아놓고, 원로원의 결정을 승인하고 62명의 자코뱅파 의원을 제명하고 12월 22일까지 6주일간의 휴회를 결의하였다. 밤 2시, 세 사람의 통령이 의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선서하였다. 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라고 한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 --pp.207 중에서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 한편 전후 처리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던 빈의 열국 회의는 나폴레옹의 탈출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이견을 조정하여 불의의 도발자에게 대비하였다. 3월 25일 4대 연합국은 쇼몽 조약을 재확인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나폴레옹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던 웰링턴 휘하의 영국군 9만 6,000명과 블뤼허 휘하의 프로이센군 12만을 먼저 치기로 하였다. 그는 6월 6일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나폴레옹의 참패였다. 그는 두 빈 손을 내밀며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고 소리 질렀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결국 22일 퇴위하고 29일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10월 15일 남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었다. 그는 거기서 5년 반을 더 살다가 1821년 5월 5일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