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맺는 열매의 양은 각자 다르다. 예수님은 좋은 씨앗이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 13:23)고 말씀하셨다. 신자들이 맺는 열매의 양은 제각기 다르지만, 참 신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열매가 없다면 그 사람은 참 신자가 아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우리는 결신과 강단 초청에 응하는 것과 죄인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개인을 회심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다. 결신하고, 강단 앞으로 나가고, 손을 들고, 카드에 서명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는 없다. 마음속에 참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이다. --- p. 29-30
우리는 ‘회심’과 ‘회심의 경험’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께서 영혼 안에서 초자연적인 사역을 행하시는 순간을 모두가 다 즉시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름대로 기준을 정해 우리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나는 회심의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회심 경험을 아무리 많이 말한다고 해도 그 경험이 영혼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역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성령을 통해 중생의 역사가 이루어졌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을 실제로 경험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한 달, 심지어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따라서 내가 회심의 날짜와 시간을 아무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회심의 사실이 아니라, 단지 나의 경험과 관련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인인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일 가운데 하나는 경험을 신학의 토대로 삼는 것이다. 그 누구의 경험도 신앙생활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경험의 의미와 중요성을 오해하거나 곡해할 소지가 있다. 우리의 경험을 성경에 비춰 보고 감정이나 경험이 아닌 성경 말씀을 믿음의 근거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확신의 근거로 삼으면,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온갖 종류의 의심에 스스로 빠져드는 결과를 낳기 쉽다. 우리는 모호한 열정에서 비롯하는 경험이 아니라 구원의 확실한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