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뭐 있나. 이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그렇게 일상이 쌓여 내 인생이 되어가는 거지. 어느새 나는 사라지고, 엄마로 남았다.
엄마로 사는 것, 아내로 사는 것이 지겨울 정도로 익숙해지면, 더 이상 답답하지 않고 편안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 역시도 마음 같지 않다. --- 「프롤로그」 중에서
저는요, 날마다 웃으면서 나왔어요. 오는 길이 예뻤어요. 예쁘게 보였어요. 아, 오늘은 뭐 배우지? 오늘은 어떤 선생님이 오시지? 갑자기 확 어려져서 스무 살로 돌아간 거 같았어요. 강의실에 앉아서 이렇게 노트 펴고 펜 잡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감격스럽고, 그래서 늘 웃으면서 왔어요. 집에서 여기 오는 길이 너무 좋았어요. 꽃도 이쁘고, 나무도 이쁘고, 하늘도 이쁘고, 구름도 이쁘고. 아, 정말 좋았어요. --- p.126
연출 선생님이랑 다른 선생님들까지 세 분이 한꺼번에 딱 들어오시는데, 영화에서 슬로모션으로 세 주인공이 걸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 여기서부터 진짜 시작이구나! 그렇게 느꼈어요. 세 분의 등장은 그런 무게감이 있었거든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일까, 우리가 찾고 있는 반란이 드디어 여기서 시작되는 건가보다 싶었죠. 창피하고 부끄러워도 나를 드러내야 하는 시점이 왔다는 걸 알았어요. 꼭 자기 삶의 이야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연극이라는 게 자기의 숨겨진 내면을 끌어내는 작업이잖아요. 그걸 불러일으켜 세워야 할 때가 왔다는 느낌이 온 거죠. --- p.136
연극은 가면이다. 그 말씀이 정말 기억에 남았어요.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갈 수 있겠다, 그런 필요성을 느끼게 된 거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 어쩌면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얘기일 수도 있어요. 확실히는 몰라도, 그런 느낌은 받았어요. 연극의 매력이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거잖아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표출하는 거잖아요. 제가 표현을 잘 못 해서 그러는데, 남들이 ‘그건 남들의 삶이야’라고 말하는 게 사실은 제 삶일 수도 있다는 거죠. --- p.146
부글부글 끓는 게 있어야 돼요. 그래야 밖으로 나와요, 엄마들이. 덜 끓으면, 아무리 불평을 해도 밖으로 못 나와요. 아직 때가 안 된 거죠. 어떤 사람은 말로 막 하소연을 안 하고 혼자 묵묵히 지내는데, 잘 지내는 거 같았는데 어딘가에 가서 뭘 하고 있어. 그 사람은 속에 끓던 게 이제 정점을 지나서 터진 거예요. 그때가 와야 돼요. 자기가 견딜 만하면 잘 지내더라구요. --- p.172
무대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살면서 느끼는 것을 고스란히 가져간다면, 연기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연극이 제 삶과 같이 간다는 걸 느껴요. 연극과 나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는 거죠. 연극은 나고, 나는 연극이고. 대본에 투영된 현실에서 나를 다시 보면, 내 이면에 있는 모습이 분명히 있어요. 역할에 씌워서 숨겨진 내면이 드러나 같이 갈 수도 있고. 같은 역할이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되잖아요. 당연히 배우가 다르면 사람이 다르고 음색이 다르니까. 그래서 연극은 내 인생이구나, 생각해요. 저한테는 여러 가지 면이 있고 여러 가지 역할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 가면도 같이 가지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 p.194
제가 자존감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연극하면서 자존감을 키우는 방법을 많이 배운 거 같아요. 언니들이 많이 격려해주시고 해서. 자존감이 평생 가는 게 아니더라구요. 업데이트를 해줘야 되잖아요. 그냥 놔두면 자꾸 소진되고 사라지니까, 계속 새로운 자존감을 리필해야 되는 거야. 그래야 새로운 걸 자꾸 할 수 있는 거더라구요. 자존감이라는 건 그냥 있는 것도 그냥 생기는 것도 아니고, 생겼다고 영원히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로만 했던 거를 몸으로 느낀 거예요. 딱 한 사람만 저한테 칭찬을 해주면, 그걸로 되더라구요. 억지로 끌어낼 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게 자존감이 쑥 올라갔죠. --- p.204
제 안에 무대에 대한 선망이 있으니까, 직접 한 번 뛰어보는 것이 인생에 큰 전환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성질이 급해서 그런지 도전을 쉽게 하는 편이고, 호기심도 많은 편이에요. 떨리는 거 생각 안 하고, 그냥 하면 된다 생각하고, 막 앞으로 가요. 편안하게 시작했는데 막바지에 작품이 완성되어갈 때쯤, 나만 즐기자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협업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나를 죽이는 것도 생각해야겠다. 연극을 하면서 좋았던 건 기다리는 걸 배운 거죠. 남들을 기다리는 것, 내 의도와 맞아떨어지지 않더라도 기다려주는 것. 이게 가정생활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제 직업상 아이들을 휘젓는 게 익숙한데, 인생을 살면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연극을 하면서 조금 더 체득했어요. --- p.208
주부니까 살림도 더 잘해야 돼요. 애들은 팽개쳐놓고 하는 거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프로도 아닌데 연극하러 다닌다고 욕먹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게 되면 연극 자체를 욕 먹이는 게 될 수도 있으니까. 공연이 잡히면, 더 열심히 청소하고 집안일 하고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요. 집에서는 제가 연극 그 자체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
무대 올라가고 안 올라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구요, 단원들과 그저 차 한잔 함께 마시는 거, 끈은 놓지 않고 있다는 거, 내 마음을 연극이라는 곳에 내려놓는 거죠. 옛날엔 욕심만 있었어요. 마음은 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다기보다는 내려놓는 게 맞는 거 같아요. --- p.209
내가 바라는 건, 내가 배우가 되는 게 아니라 이 ‘엄반’이라는 극단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함께 차 한잔 마시고, 함께 연극을 보러 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으로 족하다. 나보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 그리고 하늘공주 말대로, 같이 즐겁게, 노는 것. 행복한 엄마로 살기 위해서, 인생에 작은 배역은 없으니까, 나는 더 이상 작은 배우가 아니니까.
지금 살림을 하고 부지런히 외출 준비를 하는 나도, 무대 아래의 나도, 무대 위의 나도, 모두 다 나의 자아다. 그 모든 삶이 전부 다 나의 것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