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현대사의 독극물이다. 인간이 민족의 이름으로, 깃발에 대한 소아적 환상으로 서로를 불태우고 도축하는 일보다 더 야만적인 부조리는 없다. 시민권은 쌍무 계약으로, 언제나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며, 필요하면 파기도 가능하다. 거대 불의와 거대 오류를 감내할 가치가 있는 인간의 도시는 없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아테네의 생존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프랑스 역사의 가장 빛나는 일은 프랑스인들이 드레퓌스 사건으로 공동체가 무너지고 민족적 유대가 약화될 위험을 (실제로 그랬다) 감수했다는 것이다. 포스터 훨씬 이전에 이미 존슨 박사가 애국주의를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정의했다.
나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국경과 여권 없이 사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이 상처 가득한 지구에서 모두가 서로의 손님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계속 생존을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조국은 (동구건 서구건) 현대 관료주의 정권의 감시와 괴롭힘이 각자에게 자기 일을 하도록 허락해주는 작은 공용 공간이다. 그것은 호텔 방일 수도 있고 가까운 공원 벤치일 수도 있다. 나무는 뿌리가 있지만, 사람은 다리가 있기 때문에 양심에 아니라고 느껴지면 떠날 수 있다. 그래서 포스터의 도전적 발언에는 옹호할 만한 보편적 휴머니즘이 있다. 앤서니 블런트가 화려한 경력을 버리고 황폐한 모스크바로 망명하거나 케임브리지 친구들을 밀고하는 대신 자살을 했다면, 우리는 그를 반역자라고 욕할지언정 포스터의 고귀한 패러독스를 실행한 자로 인정하고, 소년 시절의 충성이라는 오랜 전통을 나름의 논리로 완성했다고 보았을 것이다. 블런트는 물론 그렇게 무모하거나 우아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조국과 친구 모두를 똑같이 냉혹하게 배신했다.
오늘날의 고교생들은 뉴턴이나 가우스는 모르던 방정식을 푼다. 생물학과 학부생들은 다윈을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그 반대다. 서구에서 앞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능가는 고사하고 그에 필적할 만한 작가도 나올 수 없다거나 음악계에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가 보여준 놀라운 다산성은 다시는 없을 거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직관적으로는 막대한 설득력이 있다.
인간 종이 정치 권력을 행사할 때 야만성에 자주 의지한다는 것은 투키디데스보다도 오래된 진부한 사실이다. 대학살은 수천 년을 변함없는 소음으로 장식했다. 우리가 예술, 지성, 공민권이 꽃피었다고 평가하는 고대 사회들도 노예, 식솔, 장애인, 광인에 대한 대접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연민의 오아시스는 드물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천국의 보상을 약속했다.) 칭기즈 칸이 지나간 자리에 풀이 다시 자랐는지 어쨌는지 아무도 모른다. 30년 전쟁이 벌어질 때 중부 유럽의 벌판들에는 늑대들만 남아서 바람을 삼켰다.
여기 새로운 것은 없다. 다른 증언들도 그 악몽의 이미지를 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슈페어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진단에 아주 중요한 문제들을 건드린다. 그는 총통과 그 문제와 관련해 대화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다(히틀러의 역겨운 비공식 대화들에서 강제 수용소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방대한 기억의 더미를 샅샅이 훑은 슈페어는 유대인 혐오는 히틀러라는 존재의 절대적이고 확고한 핵심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히틀러의 정치학과 침략 전쟁들은 “이 진정한 동기를 가리는 위장막에 불과”했다. 히틀러가 유언에서 전쟁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유럽 내 유대인의 근절을 말한 것을 생각하면서, 슈페어는 히틀러에게는 유대인의 박멸이 독일 민족의 승리나 생존보다 더 중요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조지 오웰은 ‘1984’라는 제목을 선택하면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시간의 한 조각에 자신의 서명을 붙이고 소유권을 가져간 것이다. 다른 어떤 작가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볼 때 문화사에 이와 진실로 유사한 사례는 하나뿐이다. 카프카는 자신이 로마자 알파벳 하나를 점유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대한 목격자가 있다.) 그는 ‘K’가 앞으로 오랫동안 그가 소설에서 사용한 파국의 익명성을 지칭할 것을 알았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정의를 부르짖은 이후, 그리고 초기 기독교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세 번째로 나타난 희망의 대형 청사진이었다. 돈과 경쟁심 대신 사랑과 연대를 교환하는 인간 사회를 상상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1844년 원고는 예레미야, 아모스, 그리고 복음서의 초월 요구를 고쳐서 말하는 것이었다. 지상에 정의롭고 계급 없는 형제애의 왕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촉구는 메시아 사상을 세속 용어로 옮긴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요구는 유토피아적이라는 것, 인간은 약간의 재능이 있는 야수라는 것,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것을 안다?옛날부터 알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게다가 더 암울한 것은 이제 평등, 공공의 합리, 희생적 헌신이라는 이상이 강제될 때는 용납 불가능한 비용이 따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플라톤의 유토피아 환상을 통해 진작 알았어야 했다). 인간의 이기주의, 경쟁심, 낭비와 과시 욕망은 폭압이 아니고서는 억누를 수 없다. 그리고 그런 폭압을 행사하는 당사자들 자신이 부패에 빠져든다. 집단주의-사회주의적 이상은 불가피하게 이런저런 형태의 굴라크를 만드는 것 같다.
편지 중 최고는 “작업 관련” 편지들이다. 브레히트는 개인적 관심사에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는 키츠나 프루스트처럼 편지를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편지는 텍스트의 초고도, 내적 성찰도 아니다. 그것은 제작 계획서고, 조직의 공지, 멍청한 비평가나 게으른 출연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브레히트는 계약, 인세, 해외 판권을 냉정히 주시했다. 그리고 점점 높아가는 나치의 물결에 맞서 공산주의 극단, 노동자 극장, 붉은 문화 전선을 조직하고 유지하려고 했다. “지식인들의 문제는 느낌으로 시작해서 숙취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가 연출자 에르빈 피스카토어에게 쓴 편지에 한 말이다.
러시아 문학의 천재성에는 모순이 있다. 푸시킨에서 파스테르나크까지 러시아 시와 소설의 대가들은 세계 전체에 속한다. 그들의 서정시와 장단편 소설들은 불충분한 번역으로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그것을 빼고는 우리의 감정과 공통된 인간성의 레퍼토리를 상정하기 어렵다. 역사가 짧고 유형이 제한적이지만, 러시아 문학은 이런 매혹적인 보편성을 고대 그리스와 공유한다. 하지만 러시아 바깥에 있는 푸시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만델스탐 독자들은 언제나 외부인이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들은 내적 담론을 엿듣는 자들이다. 그 담론은 아무리 강력하게 소통되고 보편적 적절성을 띠었다 해도, 뛰어난 서구의 학자와 비평가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 의미는 완강하게 민족적이고, 수출에 저항한다.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경우처럼, 셀린의 상상력과 폭발적 웅변의 원천은 혐오다. 일반적으로도 미적 형식에서도 혐오는 숨이 짧다. 그것은 큰 공간을 채우지 못한다. 하지만 소수의 대가들?유베날리스, 스위프트, 셀린?에게서 인간 불신, 세상에 대한 구토는 전면적 규모의 구상을 낳는다. 혐오의 단음이 협화음이 된다. 셀린의 학생 사르트르는 도시의 유대인은 인간의 나약함을 하나의 점에 집중시키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유대인은 그냥 인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더 인간이다. 이런 혼탁한 견해로 보면, 유대인 혐오는 인류 일반에 대한 경멸의 자연스러운 추출물이다. 인간의 추함, 부패, 탐욕, 허영, 근시안에 대한 혐오를 발산할 가시적인 표적을 데투슈는 유대인에게서 찾았다. 혐오의 문장 가운데서 le youpin(유대인)을 l’homme(인간)로 바꾸면, 성서 못지않게 위대한 표현들이 나온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소돔과 고모라로 만든 데 대한 저주다.
하지만 다른 방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최후이자 가장 열렬한 중부 유럽인 중 하나였다. 여기서 중부라는 것은 지리적 개념?해방된 유대인을 위해 프랑크푸르트-빈-프라하-파리가 마련한 공간?뿐 아니라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표현처럼 유럽 역사의 진수라는 개념도 담고 있다. 아도르노, 에른스트 블로흐 등 이른바 비판이론과 문화 철학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사람들처럼, 벤야민은 다언어 사용자라는 정체성, 지식 계급에서의 역할, 자신의 신체 자체?커피하우스 현자의 것?를 유럽의 운명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미국 망명을 너무 늦게 시도했다. 반면에 그의 동료와 친구들--아도르노, 블로흐, 호르크하이머, 브레히트?은 다양한 수준의 기회주의를 발휘해서 그 일에 성공했다.
그런 부침을 뚫고 두 사람이 계속 대화를 한 것, 그것을 영속시킨 것은 카프카에 대한 토론이었다. 벤야민과 숄렘은 아마도 잠재의식적으로 그들의 관계가 긴장될 때마다 카프카에게 돌아갔던 것 같다. 그 결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일련의 해석?비평적 묘사?이 태어났다. 그에 비교하면, 현재의 해체 또는 후기 구조주의의 자위적 장난은 민망한 수준이다. 숄렘과 벤야민은 거듭해서 카프카의 소진되지 않는 심오함을 두고 거의 그 대상에 필적할 만큼 창조적인 이해력을 발휘했다.
우리의 혼란한 세기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활동, 성·사회·문학·정치를 비판한 그 여성의 열정적 삶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얄팍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변함없이 정치 사회 이론의 중추적 인물이자 전체주의의 어둠을 뚫고 나온 강렬한 목소리다. 하지만 두 여성 모두 엄격한 의미의 철학자는 아니었다. 여기에는 극도의 엄정함이 필요하다. 철학적 사고는 대답보다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대답이 생기면 그것은 새로운 질문이 된다. 이 직업의 명예는 비타산적 초연함, 현실적 이익의 절제다. 철학적 자세?특히 형이상학적 분야, 그리고 신학과 접촉하는 (인정하건 부인하건, 그래야 한다) 곳에서?는 엄격한 의미로 탈속적이다. 철학적 감성은 인체에 대한 무관심, 심지어 경멸까지 품는 특징이 있다. 이런 엄혹한 의미로 볼 때 서양 전통에서 철학자의 반열에 오른 여자는 단 한 사람, 시몬 베유뿐이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 전문가가 자신의 특수 분야를 초월해서 큰 명성을 얻으면 뒤에 남은 동료들은 그를 폄하하면서 결속을 다진다. 마르크스와 강단 경제학자들, 프로이트와 동시대 심리학자들, 토인비와 역사학자들이 그랬다. 떠오른 ‘스타’가 과거 동료들의 치졸함과 편협함을 비난하면 사태는 더욱 나빠진다. (게다가 레비-스트로스는 경멸의 대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성사와 위인의 전기는 그렇게 말한다? 위대한 외톨이는 자신이 추방된 분야 전체를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비난자들은 대가의 회고록에 한심한 각주로 살아남을 뿐이다.
오직 서양인만이 (헤로도토스 시절부터) 다른 인종과 문화에 체계적인 호기심을 품었다. 오직 그들만이 분류를 위해, 비교와 대조 연구로 자신들의 뛰어남을 정의하기 위해, 최고의 오지들을 탐험했다. 이 탐색은 자체로는 비타산적이고 희생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와 함께 정복과 파괴를 이끌고 갔다. 분석적 사고는 그 자체로 기이한 폭력을 띤다. 무언가를 분석한다는 것은 지식의 대상을,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중요한 것이라도 결국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해체하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다른 분야의 “아는 자”들보다 더 파괴를 몰고 다닌다. 인류학자의 방문 이후 손상되지 않은 원시 문화는 없다. 그들이 가져오는 선물?의약품, 각종 물질과 지식?마저 그곳의 생활 방식에 치명적 역할을 한다. 서양의 지식 사냥은 비극적 의미로 최종적인 착취다.
『슬픈 열대』가 오늘날의 생태적 불안을 담은 최초의 고전 중 하나라면, 그것은 거기 그치지 않고 인간 실패의 도덕적-형이상학적 알레고리를 담은 훨씬 더 큰 책이기도 하다. 그것은 고고한 우울감 속에 『신화학』 종결부의 지구의 이미지?인간과 그 쓰레기를 비워내고 식어가는?를 기대한다. 이 기대에는 신파melodrama가 있고, 약간의 과시도 있다(몇 주 후에 레비-스트로스가 몽테를랑의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직을 승계한 것은 아름답고도 올바른 일이다). 하지만 심오하고 진정한 슬픔도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를 마무리하면서 ‘인류학anthropology’은 이제 ‘엔트로피학entropology’처럼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연구는 해체와 멸종의 학문이 되었다. 현대 문헌에 이보다 더 어두운 말장난은 없다.
윈스턴 처칠의 80회 생일에 한 영국 신문은 이 “현존하는 두 번째로 위대한 영국인”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이 찬사가 대담하고 당돌한 것은 생략한 전제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학자와 급진주의자들에게 생략된 이름은 분명했다. 바로 버트런드 러셀이었다. 그 판단은 계속 유지될 것 같다. 그리고 영국 바깥으로까지 뻗어갈 것 같다. 러셀의 존재는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지성과 감수성의 역사를 누구도 불가능한 방식으로 채울 것 같다. 그만한 존재감은 아마 볼테르 이후 처음일 것이다.
왜 세상에는 4천 개도 넘는 언어가 있는가? 언어의 개수는 왜, 예를 들면 인종 수나 혈액형 종류의 천 배나 되는가? 자연 선택과 적응이라는 다윈주의의 변형은 여기 적용되지 않는다. 동물군과 식물군의 엄청난 다양성은 지역적 상황과 경쟁적 생존의 필요 조건에 세밀하게 적응하는 경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웃하는 언어의 분화는 그 반대다. 언어의 다양화는 인간 협력과 경제 발전의 가장 명백하고 힘겨운 장벽 중 하나였다. 그것은 많은 인간 거주지를 내부에서 분열시키고 역사적으로 고립시켰다. 정체되거나 파괴된 문화들 중 많은 수가 언어적 낙오자였을 것이다(이것은 개인적, 사회적 성취에 한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더 적절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바벨 탑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가 없는 신화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언어의 분화가 세우는 소통 단절의 벽 앞에서 사람들이 좌절을 느꼈다는 강력한 증거다. 번역은 그것을 이기는 승리가 아니라 영원한, 하지만 많은 문제를 수반하는 필수 행위다.
이런 박학의 열정 뒤에는 개인의 재능과 근면 이상의 것이 있다. 머리는 모든 경험을 끝까지 이용하고, 모든 감각을 조직된 지식 산출에 동원하는 빅토리아 시대 역량을 극적으로 증언한다. 머리가 고원 산책길에서 본 들꽃은 식물지가 되었다. 그의 눈은 히스 황야와 수로의 지형을 생생하게 담았다. 그가 부싯돌이나 중세 질그릇 조각을 주우면, 그것이 들어갈 향토사나 민족사가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심장도 두뇌도 낭비 행동이 없었다. 이런 감각과 추상을 넘나드는 지식의 탐욕은 브라우닝의 시, 칼라일의 산문, 길버트 스콧의 수많은 건축에서 볼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강한 자신감, 그리고 집중력과 기억력의 단련이 자리 잡고 있다. 그와 비교하면 우리의 교육 제도란 거의 기억 상실의 체계화고, 우리의 업무란 전화 통화 사이의 쉬는 시간이다.
애들러는 허친스를 괴롭혔지만 어떻게 해서인지 그 관계는 유기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기이한 유대가 생겨났다. 끊임없는 정의, 재정의, 담론이 뒷받침하는 인간 지식의 총체적, 체계적 집대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아퀴나스적 약속이 두 사람 모두를 타오르게 했다. 모티머 애들러는 도발하고 자극하는 법을 알았다. 허친스는 도발과 자극을 행정과 교육으로 옮기는 법을 알았다. 더욱이 두 사람은 완전한 의미의 법학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다. 플라톤이 가르쳤듯, 법은 인간의 도시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도시가 계몽되려면, 그것이 살아 있는 전통을 보호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공간이 되려면, 정의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서 시카고 로스쿨이 중심적 역할을 하고 대학 풍토의 정신적·철학적 지표가 된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