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의 힘은 엄청났다.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고, 파도는 그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컸다. 바다 쪽으로 패들링하면 바람 때문에 오른쪽으로 계속 밀려났다. 애써 몸을 돌려 다시 패들링하며 보드에 서려고 할 때마다 가볍게 쓰러져 바다로 고꾸라졌다. 그렇게 두 번만 패들링+업 자세(라고 생각했지만 엉거주춤 엉덩이를 뺀 자세)를 취하면 몸은 이미 해변 근처까지 밀려나 있었고, 거센 파도는 마지막 마무리로 나를 모래밭에 내리꽂았다. 내가 연약해서가 아니다. 플라밍고 튜브를 타고 놀던 몸 좋은 젊은이도 거센 파도에 밀려 모래사장으로 가볍게 내팽개쳐졌다.
--- 「혼밥을 넘어 혼자 서핑하기」 중에서
허탈하게 돌아서서 터덜터덜 내려가는데, 옆으로 소나무숲이 보였다. 관동대 내에 조성된 숲이었다. 소나무들이 키가 길쭉길쭉하게 컸고, 꽤 울창했다. 홀린 듯 숲으로 내려갔다.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핸드폰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음악을 틀었다. 그러고 메모장을 켜서 글을 적어내려갔다. 한 시간 정도 술술 쓰다보니 어느새 완성되었다.
고개를 들었다. 축구하던 사람들은 이제 없었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앞을 멍하니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문득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기분 좋고, 바람도 시원했다. 계획대로 된 일은 없었지만 원하는 대로 다 된 하루였다.
--- 「강릉은 자주 오지 않고, 자주 닫는다」 중에서
술과 음악만 있으면 세상 제일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남자친구가 없어도,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행복했다. 그때는 이들과 영원히 이러고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좋은 순간도 결국 끝이 있었다. 어떤 계기가 있던 건 아니다. 각자 결혼하고, 직업을 바꾸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삶이 바빠지고 자연스레 만남이 뜸해졌다.
하지만 슬퍼하기보다 인생의 한 시절을 어울려 행복하게 지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린 각자 살아가다 운 좋게 한 시절 합이 맞아 모였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길이 조금씩 갈라져 각자의 인생을 걸어가게 된 것뿐이다. 그렇다 해도 인생의 한 부분을 함께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 「해변에서 와인 마시던 친구들은 어디로 갔나」 중에서
“안목해변에서는 버거웍스에서 거짓말 좀 보태 얼굴 사이즈만 한 수제버거를 해체해서 먹은 다음, 근처 카페 AM 3층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멍때리면 돼. 강문해변에서는 GANGMUN이라고 만들어놓은 커다란 조형물 앞에서 사진 찍는 거 잊지 말고. 경포해변에서는 씨마크 호텔 로비를 통과해 근사한 경치를 즐기며 짧은 오솔길을 걸어 내려올 수 있어. 씨마크 호텔에서 묵지 못한다면 아쉬운 대로 근처 경치를 즐겨보라구.
사천해변은 새로 생긴 카페들도 좋지만, 그쪽 터줏대감 카페 카모메에서 푹신한 소파에 앉아 늘어져 있는 걸 추천해. 사근진해변에서는 허우적거리는 초보 서퍼들을 보며 바닷가에 발을 담그는 게 좋지(파도가 거센 날에는 서핑 절대 하지 마). 주문진해변에서는 좀 놀다가 주문진 수산시장에 가야 해. 회를 떠서 근처 양념집에서 소주랑 함께 먹고 매운탕으로 마무리하는 거야. 5~6만 원이면 둘이서 배 터지게 먹을 걸.”
--- 「강릉엔 경포대만 있는 게 아니다」 중에서
“H, 결혼은 할 거예요?”
H와 나는 삼심 대 중반 싱글 여성이다. 둘 다 비혼주의도 아니고, 언젠간 아기도 낳고 싶다. 그러나 현재의 삶, 그러니까 끊임없이 도전하고, 상황에 따라 커리어를 유연하게 선택하고, 기회가 되면 지방에서 일하는 이런 생활에 결혼을 끼워넣을 수 있을까?
난 지금 삶에 만족한다. 완벽하지 않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맞춰놓은 삶. 이렇게 만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물론 지금 인생도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싫은 요소는 전부 배제하고, 내게 최적으로 맞춰놓았다. 현재 내게 일은 ‘커리어’라기보다 ‘인생 자체’에 가깝다. 그리고 아슬아슬할지언정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이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는 때가 오고 있었다.
--- 「인생 2막은 과연 시작할 수 있을까」 중에서
G가 비건이 된 건 2~3년 전이지만 그전에도 고기는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승희는 고등학교 때 채식을 시작해 20대 초반까지는 페스코를 유지했고, 20대 중반에는 해산물은 먹되 유제품과 달걀을 먹지 않기 시작해, 30대 들어서 비건 지향으로 바뀌었다.
승희가 비건으로서 어려움을 느낀 건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람들과 함께 음식점에 가면 음식 주문할 때 까다롭게 군다고 할까 봐 눈치가 보였고, 자연스레 점심을 굶는 날이 많아졌다.
가끔 비건에 대해 비꼬는 사람도 만났다. ‘채소도 아픔을 느낀다는데? 그럼 채소도 먹으면 안 되지 않냐?’ 이런 말을 들어도,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보여 비건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어줄까 봐 그냥 웃고 넘어간 적도 많았다.
--- 「비건걸즈와 함께한 화요일」 중에서
탐식가를 포함에 이곳 직원들의 얘기를 들으며, 확실히 젊은 세대일수록 업이나 거주 지역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마다 교통과 주거 인프라를 빠르게 구축하면서 생활 편의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고, 꼭 서울에 있는 회사를 다녀야 성공하는 시대는 지났으므로. 그리고 지금 엄청난 민폐를 끼치고 있는 코로나19가 직업과 경제의 모든 지형을 바꿔놓으리라는 점도 한몫한다. 우리는 점점 ‘정답이 없는 시대’라는 말이 정답인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 「지방으로 내려가는 똑똑한 청년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