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3월 22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에서 태어났다. 20대에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학교를 네 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6학년 2학기에 청기면 청기국민학교로 전학해 반년을 다니고 졸업했다. 전기도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두세 살씩 많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교장 아들’이라고 던지는 눈총이었다. 그러던 중에도 담임이었던 이창호 선생님이 일기 속에 들어 있는 자작시 한 편을 빨간 펜글씨로 칭찬해 주신 것이 위안이 되었다. 읍내에 있는 영양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평생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한편 시인이었던 박주일 선생님의 눈에 띄어 특별 수업을 받았는데, 선생님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글을 쓰게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권택명과 의기투합해서, 다른 후배들과 함께 ‘소라문학동인회’를 만들었고 등사판 문집도 폈다. 작가는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이후로도 여기저기 응모하고 백일장에도 참가해, 대한적십자사 경북지부가 주최한 도내 고등학생 백일장에서 시부 장원을 했고 전북대학교가 주최한 전국고등학생 문예 작품 현상 모집에서 수필부에 대상 없는 가작으로 입선했다. 그때 제목이 <겨울 아이들>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반 아이들을 위해 난로를 피우던 이야기였다. 졸업해서 두 해 쉬고 안동교육대학에 들어갔다. 2년 동안 백일장에서 시부 장원을 두 번 하고, 학보사 주최 현상 모집에서 수필과 동화에 당선됐는데, 2학년 때 쓴 <노래하는 병>이 첫 동화인 셈이다. 1973년 졸업을 하고 그해에 버스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명계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아 이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대구아동문학회에 가입해 경주와 봉화에서 부지런히 모임에 참석했다. 그러다가 하청호, 강준영, 김재수, 권오삼, 손원상, 노원호, 김충도 선생 등 아홉 사람이 1970년 ‘한뜻 모임’을 만들고 동인지 ≪꽃과 항아리≫를 3집까지 만들었다. 그 후 6년간의 교직 생활을 끝내고, 유엔이 정한 ‘세계 어린이해’에 사시가 ‘어린이에게 꿈을, 청년에게 이상을, 가가호호에 보람을’인 부산문화방송에서 창간한 ≪어린이문예≫를 만들기 위해 1979년 6월 입사했다. 그 후 ≪어린이문예≫가 잠시 휴간됐을 때는 FM PD로 5년간 일하며 부산 MBC의 인기 프로그램인 ‘목요음악회’도 맡았다. 2008년에 퇴직했지만 ≪어린이문예≫는 지금도 변함없이 만들고 있으며, 요즘은 경남 고성에 있는 ‘동시동화나무의 숲’을 가꾸면서 유경환 선생이 물려주신 ≪열린아동문학≫을 오랜 친구, 오랜 글동무들과 함께 열심히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