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는 야만과 문명의 구분을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야만과 문명을 구분하는 방식을 수정하려 했다. 그는 신대륙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을 야만적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이성의 법칙에 비추어서 그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우리와 비교해서 그렇게 부를 수는 없다. 우리야말로 모든 야만스러움에서 그들을 능가한다.”
--- p.11, 「들어가는 말」 중에서
내가 하인으로 데리고 있던 남자는 단순하고 소박한 인간이었다. 이는 진실을 증언하기에 알맞은 조건이다. 왜냐하면 총명하고 민첩한 인간은 대개 호기심이 많고, 많은 것을 지적하며 주석을 단다. 이들은 자신의 해석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조금씩 ‘이야기’를 왜곡하곤 한다. 결코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조작하고 변형시켜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게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재료에 멋대로 살을 붙여 이야기를 과장한다.
--- p.2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각자 자기가 가본 지방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는 지리학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리학자는 우리는 보지 못한 팔레스타인 성지에 가보았다는 우월감 때문에 세계의 모든 곳을 아는 척하는 특권을 누리려고 한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잘 아는 주제에 대해서든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해서든 아는 만큼만 써주었으면 한다.
--- p.24
물론 그들은 ‘야생sauvages’이다. 자연이 저절로 자연스레 발전하면서 이룩한 성과를 ‘야생’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야생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야생이라고 불러야 할 대상은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기교로 사물의 보편적인 질서에서 멀어지게 한 것들이다. 전자에는 진실하고 유익하며 자연스러운 미덕과 특성이 생생하고 강력하게 살아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후자 속에서 타락시켜 우리의 부패한 취향에 맞도록 순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 p.25
리쿠르고스나 플라톤이 이들을 몰랐던 것이 아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들 민족에게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 시詩가 황금시대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동원했던 모든 표현과 인간의 행복한 상태를 상상하기 위해 사용했던 모든 재능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철학이 생각해낸 모든 행복한 상태의 개념이나 욕망 자체보다도 더 뛰어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p.26
한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마음과 의지 속에 존재한다. 바로 거기에 인간의 참된 명예가 깃드는 것이다. 용기란 팔과 다리의 굳셈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굳셈이다. 용기는 훌륭한 말과 무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다.
--- p.36
신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에 맞게 추위를 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고통을 주신다. 자연은 한편으로 나를 헐벗게 하였고, 한편으로 나를 감싸주었다. 힘으로 나를 무장 해제시키면서, 동시에 무감각과 통제되고 무딘 두려움으로 나를 무장시켰다.
--- p.49
재판권은 재판하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판받는 자를 위해 있는 것이다. 높은 직위는 결코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랫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의사가 있는 것은 환자를 위해서지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모든 관직은 기술과 마찬가지로,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자기 바깥에 위치해야 한다. “어떤 기술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 p.54
어찌하여 이런 고귀한 정복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의 차지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또 어찌하여 자신들의 미개한 부분을 서서히 다듬고 고쳐온 덕성을 가진 이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제국과 민족의 흥망성쇠와 함께하지 못했단 말인가. 만약 자연이 그곳에 낳아둔 이런 좋은 덕성을 망가뜨리지 않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토지를 경작하고 도시를 가꾸는 데 필요한 이쪽 세계의 기술을 전하고, 나아가 그들의 고유한 덕성에 그리스와 로마의 덕성을 더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 p.68
스페인 사람이 460명을 한꺼번에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일도 있었다. 그중 400명은 평민이고 60명은 지방 귀족이었지만, 모두 단순한 전쟁 포로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스페인 사람에게 직접 들었다. 그들은 이를 자랑하며 책으로 내기까지 했다. 정의감이나 종교에 대한 열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런 신성한 목적과는 너무나 상충되는 짓이다.
--- p.73
우리의 판단력은 병이 들어 타락한 풍속을 좇고 있다. 나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옛사람들의 아름답고 고귀한 행위에 저열한 해석을 가하거나 근거 없는 상황과 원인을 지어내어 그 영광을 더럽히려고 이리저리 궁리하는 것을 본다.
--- p.84
판단력은 모든 문제에 적용되는 도구이며, 어디에나 관여한다. 그래서 나는 판단력의 시험essais에 온갖 기회를 이용한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문제라 해도 나는 그것에 대해 나 자신의 판단력을 시험해essaye본다. 강을 건널 때처럼, 우선 멀리서 조심스럽게 깊이를 재본 다음, 강물이 내 키에 비해 너무 깊은 걸 알면 나는 강가에 머문다.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판단력이 주는 이점 가운데 하나다.
--- p.91
율리아누스 황제는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영혼에는 여러 철학 사상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는 이 사상들에 따라 자신의 모든 행동을 조절하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실제로 그는 모든 종류의 미덕에서 모범을 보였다. 순결이라는 미덕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그의 생애가 매우 분명하게 입증해준다.
--- p.102
사람들은 보통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 이렇게 되지?” 하지만 사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우리의 이성은 수백 가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원리와 구조를 생각해낼 수 있다. 재료나 토대가 특별히 필요한 게 아니다. 이성을 달려가는 대로 내버려두어보라. ‘꽉 참’ 위에든 ‘텅 빔’ 위에든, 재료를 사용하든 안 하든 무엇이든 세울 수 있다.
--- p.113
진실과 거짓은 같은 얼굴, 태도, 취향, 걸음걸이를 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같은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우리가 속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청해서 속임수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런 무의미한 일에 빠져드는 이유는 우리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 p.114
경이驚異는 모든 철학의 기초이고, 탐구는 그 발전이며, 무지는 그 도달점이다. 명예나 용기에 있어 학식學識보다 나은 참으로 강하고 고결한 어떤 종류의 무지가 있다. 그러한 무지를 지니기 위해서는 학식을 갖는 것 못지않은 학식이 필요하다.
--- p.121
몽테뉴를 상징하는 ‘크세주Que sais-je’라는 말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이다. 그것은 일종의 방법으로서의 의심, 다시 말해 자유로운 검토를 위한 의심이다. 그 성과는 자유로운 정신이다.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회의를 통해 어떤 확실성을 자유롭게 추구하려는 노력이다. 몽테뉴에게 그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 p.135, 「해제」 중에서
몽테뉴가 다른 생활 습관에 자신을 노출하고 다양한 사회의 문화적 관습을 구경한 결정적인 계기는 여행이었다. 몽테뉴는 1580년 3월 《수상록》 초판을 출판한 뒤, 그해 6월부터 장장 17개월 동안 프랑스 북동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두루 거치는 여행에 나선다.
--- p.137, 「해제」 중에서
몽테뉴는 이들과의 만남에서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이런 질문과 반성을 통해 그는 자신을 자유롭게 검토하고, 인간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사유하고 그 결과를 기록한다. 몽테뉴의 신대륙 담론, 그리고 인간의 관습과 판단력에 대한 담론은 우리가 타인의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타인을 더 잘 헤아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준다.
--- p.145, 「해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