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트의 인물들은,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무언가 가능한 것을 실현하거나 실재화하는 능동적 주체들이 아니다. 실현하고자 하지 않으므로 이들에게는 실패의 가능성조차 없다. 이들은 오로지 주어진 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무화시키는 혹은 소진시키는 집요한 유희에 몰두하면서, 가능한 것의 실현을 무한히 연기시키거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자들, 가능한 것의 가능성 자체를 소진시키는 자들이다. 고치 속에 웅크린 번데기 유충처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가능성을 소진하는 것과 스스로 소진되는 것만이 이들의 주요한 소일거리이자 습관, 그리고 능력이다.--- pp.11-12 「옮긴이 서문」
작용도 없고 반응도 없이, 이른바 ‘감각-운동적’ 연쇄 밖에서, 신체로 가시화된 힘들의 미세한 변용만으로 이루어진 듯한 베케트의 단편극들은 말 그대로 「영화」 이후에 온, 영화의 잠재태 같은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들의 역량을 존재론적으로 논파하고 있는 「소진된 인간」은 들뢰즈의 두 권의 영화론 이후에 온 또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론이다.--- p.18 「옮긴이 서문」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이다.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내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를. 좋다, 그것 말고 내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으랴.” 더 이상 가능한 것은 없다. 철두철미한 스피노자주의. 그 자신이 소진되어 가능한 것을 소진한 것일까, 아니면 가능한 것을 소진해버렸기에 그는 소진된 것일까? 가능한 것을 소진하면서 그는 소진된다. 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는 가능한 것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을 소진한다. 모든 피로 너머에서, “결국 다시 한 번” 가능한 것과 끝장을 본다.--- pp.23-24 「소진된 인간 I」
이미지는 대상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다. 대상의 관점에서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일지라도, 우리는 이 이미지들의 역량을 알 수가 없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이름이나 목소리 들의 랑그가 아닌, 소리를 울리고 색채로 물들이는 이미지의 랑그, 랑그 III이다. 말들의 언어는 계산, 추억, 이야기 들이 언어에 무겁게 달라붙기 때문에 성가시다. 말들의 언어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순수한 이미지는 언어와 이름, 그리고 목소리 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때로 목소리들이 입을 봉해버린 듯한 순간, 침묵 속에서 일상의 고요함을 틈타 홀연히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p.40「소진된 인간 I」
무엇보다 종말, 모든 가능성의 끝에서야 우리는 우리가 이미 그것을 이뤘음을, 우리가 이제 막 이미지를 만들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지가 본성적으로 아주 짧은 순간 지속하는 것이라면, 공간은 어쩌면 매우 제한된 장소, 즉 위니가 “땅이 꼭juste 적절하군”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고다르가 “단지juste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와 같은, 위니를 옥죄는 만큼의 제한된 장소일 것이다. 가까스로 겨우 공간을 이룬 이 공간은, 미시-시간으로 이루어진 이미지처럼 “바늘구멍” 크기로 수축된다. 동일한 검은빛, “결국 어떤 재로써만 표현될 수 있을 어떤 검은빛” “탁 하고 침묵 자 하고 완료.”--- p.45 「소진된 인간 I」
정신적 운동인 이미지는 그 자신의 사라짐, 소멸의 과정(너무 일찍 도래하건 그렇지 않건)과 분리될 수 없다. 이미지는 숨, 호흡이지만 꺼져가고 있는, 숨을 거두기 직전의 숨, 호흡이다. 이미지는 절멸하는 것, 다 타버린 것, 하나의 몰락이다. 이미지는 자신의 고귀함, 곧 영점 너머의 높이에 의해 그 자체로 정의되는 순수한 강도성, 오직 추락함으로써만 표현되는 순수한 강도성이다. 예이츠의 시에서 보존된 것, 그것은 하늘을 흘러가다 지평선에서 사그라지는 구름의 시각적 이미지, 그리고 밤의 어둠 속으로 꺼져가는 새의 외마디 외침과 같은 음향적 이미지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잠재적인 에너지를 그러모아 농축하여 이를 자기소멸의 과정으로 이끌어간다.--- p.68 「소진된 인간 II」
베케트는 텔레비전에서 일정 정도 말의 열등함을 극복할 방법을 발견한다. 「쿼드」와 「밤과 꿈」에서처럼 대사 없이 가거나, 열거, 소개 혹은 배경으로 말을 사용하여 말의 결을 헐겁게 하고 그 사이에 사물 혹은 운동을 끌어들이거나(「유령 삼중주」 「한갓 구름만……」), 「이봐, 조」의 마지막 부분처럼 멀리 떨어진 몇몇 말들을 간격이나 운율에 맞춰 고정시키고, 나머지는 겨우 들릴락 말락 한 웅얼거림으로 나직이 흘려보내거나, 「밤과 꿈」에서처럼 어떤 말들에 선율을 입혀 말에 결여되어 있던 휴지부를 선율에서 부여받거나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텔레비전 작품에서는 말이 아닌 다른 것, 즉 음악 혹은 비전이 이렇게 서로 꽉 끌어안고 있는 말들의 결을 느슨하게 하고 그 사이를 벌려놓거나 완전히 갈라놓기도 한다.--- p.74「소진된 인간 II」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역량은 우리 삶 너머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지평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기저에 실재하는 생명의 잠재적 평면, 시간의 발생적 차원에 내재한다. 베케트식 애벌레 주체들, 곧 「영화」의 인물 O나 텔레비전 단편극의 소진된 신체들이 유기체로서의 완전한 소진을 불사하면서까지 제기하는 것이 바로 이 생명의 잠재적 평면에 내재한 창조적 역량, 시간의 형식과의 조우이다. 유기체는 사실 생명이라기보다 “생명을 가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117 「옮긴이 해제」
들뢰즈는 무엇보다 인물들이 쿼드를 횡단하며 반복하는 특이한 신체 움직임에 주목한다. 이들은 대각선으로 쿼드를 횡단할 때 마치 돌발적인, 그러므로 제어할 수 없는 ‘틱’ 증상이 신체에서 일어나기라도 하듯 쿼드의 중심 부근에서 돌연 몸을 틀어 맞은편으로 이동한다. 인물들의 반복된 움직임과 특이한 리듬으로 인해 쿼드 내부에는 점진적으로 바람개비 모양의 운동의 궤적, 강도적 흐름이 형성된다. 그와 동시에 쿼드의 중심, 즉 모두가 몸을 피하는 ‘위험 지대’이자 불가촉 지대에 폭풍의 눈과도 같은 하나의 잠재적 공간이 구축된다.
--- pp.132-133 「옮긴이 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