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자신을 아이 취급하는 강혁과 별일 아닌 일에 발끈해 집에 돌아와버린 자신이 못마땅한 예은은 현관에 한참을 서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를 삭이고 있던 그녀는 거실 테이블에 놓인 와인 병을 보자 갑자기 오기가 치솟았다. “아직 술 권할 나이가 아니다?” 강혁의 말을 되씹던 예은은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가 병을 따고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단숨에 잔을 비운 그녀는 또다시 부은 볼을 하고 씩씩거리다 몇 잔의 와인을 더 들이켰다. 갑작스럽게 마신 술이 예은의 체온을 높이고 볼과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열이 오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그녀는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고정해놓은 핀을 풀어버렸다. 실내가 더워 오자 예은은 거실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한쪽으로 밀고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다 때마침 건물로 들어오려던 강혁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눈을 질끈 감고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예은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술로 인해 둔해져 있던 신경이 어느새 집 안으로 들어온 강혁의 발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금방이라도 들어올 줄 알았던 그가 소식이 없자, 예은은 살며시 눈을 뜨고 방문을 바라보았다. 밖에선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초조해진 그녀가 손가락을 화장대 위에 얹어 놓고 까딱거리며 방문을 노려볼 때, 문이 열렸다. “화해주다. 원한다면 마셔.” 자신이 들어옴과 동시에 다시 화장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는 예은의 앞에 샴페인 잔을 놓아주며 강혁이 말했다. 의외라는 듯 얼굴을 들어 그녀가 강혁을 바라보자 그는 자신의 잔을, 내려놓은 예은의 것에 가볍게 부딪혔다. “어린애를 달래는 방법치고는 너무 우아한 거 아닌가요?” 볼멘소리로 퉁퉁거리는 예은의 말에 강혁은 말없이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그녀가 잔을 들어 마시다 말고 인상을 썼다. “소다수군요.” 샴페인 잔을 소리 나게 화장대에 내려놓고 예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절 애 취급…….” 급하게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취기로 인한 어지러움을 감당하지 못해 비틀거렸다. 반사적으로 강혁이 예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단단하게 얽힌 시선 사이로 시간이 영원처럼 멈추려 할 때, 갑작스레 예은이 커질 대로 커진 눈을 하고 딸꾹질을 하자 강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벌써 꽤 마셨군.” 급하게 입을 가리던 그녀는 강혁의 말에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쏘아붙였다. “네. 마셨어요. 그래서요?” “이런 널 어떻게 어른으로 받아들이라는 거냐? 그런 철없는 오기는 어른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어.” 가늘게 뜬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듯 꺼낸 강혁의 말에 예은은 입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갑자기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왜 그러는 거죠? 예전엔 이렇게까지 절 아이 취급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과도하게 날 보호하려는 이유가 뭐예요? 경계하는 이유가 뭐냐고요!” 가까워진 그녀에게서 달콤한 와인 향과 옅은 장미 향기가 풍겨 왔다. 강혁은 자신도 모르게 예은의 어깨에 놓았던 손을 짙은 분홍빛으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로 가져갔다. 예은은 그의 손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마치 심장이 그곳으로 옮겨 온 것만 같았다. 가볍게 닿아 있는 강혁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자신을 느끼며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필요하니까.” 예은의 입술에서 급하게 손가락을 떼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예은을 밀어내려는 강혁의 어깨를 이번에는 그녀가 잡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예은이 입을 열었다.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요? 보호? 아니면 경계? 경계한다는 건 그렇게 해야 할 뭔가가 있다는 말이겠죠?” 당돌한 그녀의 말에 강혁은 잠시 침묵했다. 아이는 천천히 커간다는 말은 잘못된 진실이라고 그는 순간 생각했다. 여자들의 성장은 마치 나비와도 같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꼬물거리던 애벌레에서 탈피를 해 어느새 화려한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예은의 눈빛과 입술이 유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단지 자신이 결혼식 때부터 마셨던 샴페인과 와인 때문이라고 강혁은 결론지었다. 아주 오래전, 레스토랑에서 당돌하게 청혼했던 조그만 여자아이를 기억하려 애쓰며 그는 예은을 바라보았다. “난, 정말…….” 뭔가 말을 하려던 그녀가 다시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강혁의 상의를 잡았다. 그 바람에 그의 고개가 숙여져 두 사람의 입술이 거의 맞닿아 버렸다.
눈동자의 움직임과 숨소리, 입술의 떨림이 그 가까운 거리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붙어 있는 두 개의 심장이 같은 속도로 뛴다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혁과 예은의 입술이 포개졌다. 부드럽게 시작된 가벼운 키스는 곧 서로가 마신 다른 와인의 향이 느껴질 정도로 위험하게 깊어졌다. 강혁이 예민해진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자 예은은 생전 처음 느끼는 적나라한 흥분에 그의 품 안에서 경직되었다. 그런 예은을 강혁이 두 팔로 완전히 감싸 안았다. 혀가 깊숙이 들어오는 키스에도 예은이 당황하지 않고 강혁의 목을 끌어안자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갔다. 조금 전까지 멈춰야 한다고 경고하던 강혁의 머리는 그의 의지와 별개로 움직이는 몸을 잊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완전히 밀착한 채 서로의 입술을 공유하던 두 사람이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한 몸처럼 굳어져 갈 때였다. 문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피로연을 하기 위해 신혼부부와 친구들이 몰려온 것을 알아챈 강혁이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고 예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올렸다. 잠시 뜸을 들이며 미간을 좁히던 그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쉬어라.” 갑작스러운 상실감으로 인해 말을 잊은 그녀에게 강혁은 한마디만 남긴 채 돌아서 방을 나갔다. 아직 그의 체온이 남겨진 자신의 몸을 감싸 안은 예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강혁이라는 남자로 가득 채워졌던 가슴을 다시 그가 몽땅 비워 버리고 간 것만 같았다. 텅 빈 마음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 예은은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