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앵글로색슨 연대기 해설
1│ 개관 및 내용
로드 필사본Laud Manuscript 또는 E-필사본으로도 불리는 피터버러 연대기Peterborough Chronicle는 앵글로색슨 연대기 가운데 하나로, 노르만 정복 이후 12세기 후반 이전 시기에 일어난 영국의 역사적인 사건을 후기 고대영어 및 초기 중세영어로 기록한 유일한 산문체 영인본이다. 2절에서 피터버러 연대기를 포함한 주요 필사본에 관해 상술詳述하기 전에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관해 먼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이하 〈AS-연대기〉로 약칭)는 대부분 고대영어로 앵글로색슨인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연대기는 완본 또는 부분본을 합쳐 7개의 필사본(영인본) 및 2개의 낱장fragments이 모여 9개의 필사본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사본으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이 〈AS-연대기〉는 로마인의 영국 철수 및 그 후 노르만인의 영국 정복으로 이어지는 긴 세월 사이에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역사와 사건을 전반적으로 기술한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역사상의 기록물이다. 이 〈AS-연대기〉와 고대 영국 북부의 노섬브리아 왕국의 수도승인 비드Bede가 라틴어로 기록한 《영국민 교회사》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가 없었더라면 로마인에서 노르만인의 영국 정복까지의 영국의 역사를 서술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들 두 권을 앵글로색슨인의 역사를 기록한 위대한 역사서로 평가하고 있다.
〈AS-연대기〉의 원본은 언제 처음 기록으로 남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연대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엘프레드 왕의 통치시기(871-899)에 그의 왕국이었던 웨섹스에서 890년경 엘프레드 왕의 지시로 작성된 이후 원본 복사본을 많이 만들어서 당시 영국 전역에 퍼져있는 수도원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수도원에 배포된 복사본은 각 수도원의 필사생에 의해 그들 나름대로 다시금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고 소실된 부분을 다시 작성하거나 수정하는 과정을 거듭하기에 이르렀다.
〈AS-연대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엘프레드 왕의 통치가 거의 끝나갈 무렵 고대영어 문어체로 쓰이기 시작하였고, 가장 최근의 것은 1116년 피터버러 수도원 화재가 일어난 뒤, 피터버러 수도원에서 쓰인 것이다. 〈AS-연대기〉의 서문은 엘프레드 왕의 가계家系에 관한 자세한 서술로 시작하여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기 60년 전, 로마의 첫 황제인 줄리어스 시저Julias Caesar가 브리튼을 침략하여 원주민인 브리튼인Britons과의 전투에서 싸워 이겼으나, 그곳에 왕국을 세우지는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다음, 로마 황제인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의 통치 56년 가운데 42년째 되는 해에 그리스도가 태어났음을 알리는 기원 1년으로 시작하여 동방 여러 지역에서 점성가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러 베들레헴으로 왔고, 그리스도에 대한 헤롯왕의 박해로 인해 베들레헴의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했다(Year 2)는 성서 및 로마인 이야기를 거쳐 노르만 정복 이후 12세기 중반까지의 사건으로 전개되는 상황으로 이어 서술하고 있다.
〈AS-연대기〉는 또한 영어의 변천사(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으로, 특히 11세기 중엽 이후에 기록된 〈피터버러 연대기〉는 가장 초기 시기에 쓰인 중세영어 텍스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연대기 가운데 7개의 영인본 및 낱장들은 영국 국립도서관British Library에 보관되어 있고, 나머지 2개의 영인본은 각각 옥스퍼드대학의 보들리언 도서관Bodleian Library 및 캠브리지대학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파커 도서관Parker Library에 보관되어 있다.
2│ 4개 주요 필사본 개요
《앵글로색슨 연대기》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파커 도서관에 보관된 윈체스터 필사본Winchester Manuscript[A]은 일명 파커 연대기Parker Chronicle라고도 한다. 후기 서색슨 표준어에 일치하지 않은 언어로 기록된 유일한 필사본이다. 이 필사본은 엘프레드 왕의 가계家系를 설명하는 서문으로 시작하여 기원전 60년부터 편년체로 기록되고 1070년에 연대기의 기록이 끝나게 된다. 이 필사본은 당시 켄터베리 대주교이며,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학감이었던 매튜 파커(Matthew Parker 1559-1575)가 사들였으며, 파커가 사망한 뒤에 이 대학에 기증하였다. 이 영인본은 기원후 891년까지 한 사람의 필사생scribe에 의해 쓰였고 그 후의 기록 연대는 다른 여러 필사생에 의해 쓰였다. 이 영인본은 아마도 엘프레드 왕의 통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윈체스터의 올드 민스터Old Minster에서 쓰이기 시작하여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켄터베리의 그리스도교회로 옮겨졌다.
영국 국립박물관에 보관된 윈체스터 필사본의 복사본[A2]은 1731년 애쉬번햄 하우스Ashburnham House가 불타면서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었던 코튼 도서관이 함께 타버려, 불과 몇 개의 낱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화재가 일어나기 전, 리치필드의 고고사학자이며 학감이었던 로렌스 노웰Laurence Nowell에 의해 복사본이 작성되었고, 1643년 에이브러험 휠록Abraham Wheloc에 의해 〈AS-연대기〉의 판본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따서 [W]-판본으로 부르기도 한다.
10세기 후반 한 사람의 필사생에 의해 쓰인 애빙던 연대기Abingdon Chronicle(I)는 기원전 60년부터 977년까지 연대순으로 고대 영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연대기는 윈체스터 연대기에서처럼 엘프레드 왕의 가계로 시작하여 고대 영국의 에드거 왕Edgar the Peaceful의 맏아들이며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왕Edward the Martyr (c.962-978)의 가계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 영인본은 977년과 979년 사이에 작성되었는데, 이 기간에 속한 978년 에드워드 왕은 살해되었다. 이 영인본은 11세기 중엽 애빙던에서 같은 명칭으로 된 또 하나의 영인본(II)의 판본이 되었다. 곧이어 켄터베리의 그리스도교회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원본에 없던 어구 삽입 및 수정이 이루어졌다. 애빙던은 웨섹스와 머시아Mercia 사이의 변경에 위치한 곳이다. 두 개의 애빙던 영인본에는 902-924년까지의 ‘머시아 연대기’ 또는 ‘애셀프레드의 연보年譜’가 삽입되어 있다. 이 영인본에는 1-977년 및 기원전 60년에서 1066년까지의 역사가 담겨있다.
리폰Ripon 또는 요크York에서 편집된 우스터 연대기Worcester Chronicle는 〈D-사본〉으로 불리며 11세기 중엽 ― 아마도 우스터 ― 에서 쓰인 것으로, 1033년부터 영국 북부 지역의 산재한 많은 기록물을 이 복사본에 삽입하였다. 북 요크셔주의 리폰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옮겨진 이 복사본은 북부 및 남부의 다양한 자료를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그 내용을 확장하였으며, 966년에 이르러 일단의 노섬브리아 연대기로 끝을 맺게 된다. 이 복사본은 966년과 1033년 사이에 우스터 교구의 한 수도원으로 옮겨져서 1079년까지 계속 편집되었는데. 1100년까지 여러 명의 필사생에 의해 복사본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들 북부의 필사생은 애빙던 연대기와 달리 엘프레드 왕의 가계뿐만 아니라 비드Bede의 《영국민 교회사》 및 노섬브리아 연대기에서 자료를 뽑아 이 복사본에 첨가하였다. 이들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사건, 특히 잉글랜드와 스칸디나비아의 관계에 정통하였다.
이 연대기의 속편이 리폰에서 편집된 사본에 첨가되기 전, 복사본이 만들어지고 다른 수도원으로 전해졌다. 이 연대기는 북부에서 한동안 지속되다가, 그 후 남부에 있는 켄터베리의 성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켄터베리에서는 〈F-사본〉으로 알려진 라틴어와 고대영어의 이중 언어로 된 요약본이 그리스도교회에서 만들어지고 영국 국립박물관(Cotton Domitian MS A. viii)에 보관되었다. 이처럼 편집되지 않은 필사본이 1100년경 한 사람의 필사생에 의해 쓰이면서 사본 여백과 행간에 빈번하게 자료를 첨가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제 흔히 〈E-사본〉으로 불리는 피터버러 연대기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 연대기(필사본)는 앞서 언급한 윈체스터(일명 파커) 연대기, 애빙던 연대기 및 우스터 연대기와 함께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구성하는 네 개의 주요 필사본 가운데 하나이다.
11세기 중엽 정복왕 윌리엄William I이 중세 영국을 정복하면서 앵글로-노르만어는 한동안 영국의 공식 언어가 되었으며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편집은 대체로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피터버러 수도원의 수도승들은 그들이 수집한 자료에 근거하여 궁정의 사건이 아닌 그들 나름의 관점에서 연대기 편집을 계속하였다. 그 결과 이 연대기는 1070-1154년까지 후기 고대영어(표준 문어체) 및 초기 중세영어로 쓰였다.
1) 현재 옥스퍼드대학의 보들리언 도서관에 영인본(Oxford, Bodleian Library MS Laud 636)으로 보관되어 있는 이 필사본(즉, 〈E-사본〉)은 1634년 윌리엄 라일William Lisle이 피터버러에서 구입한 것으로, 그는 주로 파커 영인본(즉, 〈A-사본〉)과 대조하여 필사본 여백에 내용을 보충하였고 필사본 끝에 있는 빈 여백에도 〈A-사본〉에서 여러 개의 연대기를 삽입하였으며 낱장 간지間紙에도 주로 〈A-사본〉에서 내용을 대조하여 추가로 보충하였다. 1638년 라일이 사망하자 〈E-사본〉은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로드William Laud(1633-45)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 필사본의 첫 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1638년 켄터베리 대주교이며 옥스퍼드대학 명예총장 윌리엄 로드의 사본.” 그리하여 이 필사본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드 사본’이라고도 한다. 현재 이 사본은 옥스퍼드 보들리언 도서관 소유로 되어 있다.
2) 〈E-사본〉은 세 가지 필사筆寫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2절판 81쪽 홀수로 끝나는 필사본 가운데 1121년까지는 한 사람의 필사생에 의해 쓰였다.
[2]. 1122-1131년까지는 필사에 사용한 잉크와 서체가 빈번하게 변하며 6개의 블록(1122; 1123; 1124; 1125-1126; 1126-1127; 1128-1131)으로 나누어 작성한 흔적이 나타난다.
[3]. 필사본의 마지막 부분인 1132-1154년은 이전의 연도와는 전혀 다른 필사생이 작성한 것으로, 서체가 훨씬 좁고 잉크가 더 가늘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E-사본〉은 초기 중세영어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포함된 영인본으로 꼽힌다. 즉, 첫 번째 속편인 1131년까지 편집된 사본에는 고대영어 말기의 표준 문어체 언어가 쓰였고 고대영어와 중세영어의 어휘가 한동안 뒤섞여 쓰이는 언어변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후 새로운 필사생에 의해 두 번째 속편이 기록되면서 앞에서의 언어와 달리 당시 피터버러 지역에서 쓰인 구어체 말씨가 사용되어 가장 이른 형태의 초기 중세영어로 바뀌어 쓰인다.
한편으로 〈E-사본〉의 두 번째 속편에는 새로운 언어 현상이 나타난다. 예컨대, 여성 대명사 “she” (고대영어로 scæ)가 이 속편에 맨 처음으로 쓰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영어인 서색슨 영어(West Saxon English: 고대 영국에서 쓰인 표준 문어체 영어)에서의 문법성文法性이 이 속편에서는 거의 또는 완전히 쓰이지 않게 되었다.
1116년 8월 4일 피터버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피터버러 수도원 서고書庫가 불에 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해 피터버러에서 편집된 가장 초기의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윈체스터 성당의 연대기에서 복사하여 필사한 복사본이 되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피터버러의 필사생들은 불에 타 없어져서 빠져버린 일부 연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다른 여러 연대기의 항목을 이리저리 편집해가면서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피터버러 필사본이 제대로 일관성을 유지하게 된 것은 1122년 이후의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피터버러 연대기’라고 칭하는 〈E-사본〉은 화재가 일어난 시점과 복사가 이루어진 시점을 기준으로 제〈1〉속편과 제〈2〉속편으로 구분하는데, 이 두 가지 유형의 속편은 그 전하는 정보나 속편에 등장하는 문체 및 사용한 언어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 필사본과 달리 독자적이고 독특하다. 제〈1〉속편은 1122-1131년까지 다루고 있고, 제〈2〉속편은 1132-1154년까지 다루면서 스티븐 왕King Stephen (1135-1154)의 통치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제〈1〉속편에 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연대의 중요성으로 보면 제〈2〉속편이 가장 중요하기는 하나 제〈1〉속편은 피터버러 지역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을 독특하게 기록하면서 일반 민중의 삶과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독자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제〈1〉속편은 노르만 정복, 덴마크의 스베인 왕의 잉글랜드 침략, 그리고 왕위에 관한 소요騷擾에 얽힌 소문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윌리엄과 그 아들들에 대한 색슨 인의 반란에 대해서는 전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피터버러 수도원 화재에 대해서는 술에 취한 수도승들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라는 목격자의 진술을 기록하고 있다.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장이 용병을 불러들여 수도원을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것과 같은 교회의 스캔들도 다루고 있다.
더욱이 제〈1〉속편에는 중대한 언어변화가 나타난다. 1122-1131년까지의 기록에는 이전에 쓰인 후기 고대영어와 함께 고대영어 및 중세영어 어휘가 혼재되어 쓰이고 있으며, 구문syntax의 경우에도 복잡한 명사 변화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대명사 및 강변화동사 또한 단순해졌다.
제〈1〉속편 및 제〈2〉속편을 기록한 필사생들은 평민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 제〈1〉속편은 1122년 글로스터 수도원 화재 시 44명의 도둑을 처형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무죄라는 것에 대해 몹시 분노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세금이 너무 비싸서 빈곤에 허덕이는 마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거나, 또는 굶어 죽는 일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일이 허다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반면, 귀족들은 두 가지 도덕상의 죄를 짓고 있었다. 첫째로, 귀족들은 죄 없는 이들을 처형하고 죄 있는 자들은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게 다루었다. 두 번째로 귀족들은 가난한 이들이 빵을 훔치는 것과 같은 절도죄를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들에게 강요하였는데, 이것은 적어도 귀족들에게는 사악한 행위가 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노르만인 출신 왕인 헨리 1세가 자신의 친족이 이미 생 장 당젤리Saint-Jean d’Angely의 대수도원장으로 있었음에도 피터버러의 대수도원장을 억지로 떠맡기자, 연대기 저자는 대수도원장 임명에 대한 헨리 왕의 불법과 경건하지 못한 행위에 대해 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편, 〈E-사본〉의 저자는 헨리 왕이 친족을 대수도원장에 억지로 떠맡기려고 하자 북유럽 전설에 등장하는 불길한 징조인 유령 사냥꾼의 소리가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령 사냥Wild Hunt은 밤중에 사냥꾼의 고함과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일컫는데, 유령 사냥꾼의 두목은 흔히 오딘Odin으로 알려져 있다. 드디어 헨리 1세가 죽자 연대기 저자인 수도승은 이것이야말로 신이 택한 치료법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헨리가 생전에 피터버러를 베네딕트파에서 갈라져 나온 클뤼니파 수도회Cluniac Order의 일부로 만들고 자신의 조카를 차기 대수도원장에 임명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좌절된 것을 수도승은 oc Crist it ne uuolde ‘But Christ did not do it(그러나 그리스도가 이것을 원하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1〉속편은 고대영어에 쓰인 문법성과 굴절어미에 주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여전히 고대영어에 쓰인 세 가지 문법성(남성, 여성, 중성)이 쓰이고 있기는 하나, 명사의 일부는 성性의 범주 내에서 뒤섞여 쓰이고 있다. 이것은 성을 나타내는 굴절형이 다른 기능으로 다시 쓰이면서, 이들 세 가지 성이 자연성natural gender 또는 프랑스어 명사의 성으로 바뀌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다음으로 제〈2〉속편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E-사본〉의 마지막 속편인 제〈2〉속편은 한 명의 필사생이 쓰고 잉글랜드의 혼란스러운 무정부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 속편에 쓰인 언어가 스티븐(Stephen, 1135-54)과 마틸다 시기보다 더 늦게 쓰인 초기 중세영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제〈2〉속편은 받아쓴 것이거나 나이든 한 사람의 수도승에 의해 재수집되어 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속편은 당시의 고문과 공포, 혼돈과 기아飢餓를 매우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135년 헨리 1세가 죽자 스티븐과 마틸다는 각자 자신들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였다. 수도원의 저자는 귀족(남작)들이 스티븐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과 마틸다의 도피 그리고 남작의 세력을 등에 업은 병사들이 평민들을 괴롭힌 사실史實을 기록하고 있다. 연대기 저자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우유부단하게 대처함으로써 혼란과 무질서가 일어난 것에 대해 스티븐을 질타하고 있다. 스티븐이 반란을 일으킨 귀족 무리를 잡았으나 이들의 충성 서약을 받고 놓아주었는데, 연대기의 저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반역자들은 그(즉, 스티븐)가 온유하고 우유부단하며 정의를 실현할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되자 온갖 잔인한 태도를 그대로 드러냈다.” (1137)
(þa the suikes undergæton ðat he milde ma was and softe and god, and ne iustise ne dide, þa diden he alle wunder)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