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동물이 감정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질문에 답해 줄 만한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다. 제인 구달은 1960년 탄자니아의 곰베(Gombe) 국립공원에서 침팬지들을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침팬지에 대한 구달의 남다른 열정 덕분에 학사나 석사 과정을 거치지 않고 케임브리지대학 동물행동학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구달을 향해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모른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녀가 침팬지들을 관찰하면서 번호 대신 이름을 붙여주고 각각의 침팬지들이 지닌 개성을 언급했으며 수컷과 암컷을 ‘그’, ‘그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만 해도 과학의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을 중시한 생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생각, 감정, 개성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며 동물의 행동은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자극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학계의 분위기에서 제인 구달의 행동은 과학자로서 객관성을 잃은 채 인간의 감정을 동물에 이입하는 비과학적인 태도로 보였던 것이다. 과연 침팬지에게 이름을 붙이고 개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비과학적인 연구 방법이었을까? 동물에 대한 의인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구달의 태도는 동물의 본성이나 본질을 훼손하며 잘못된 방식으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인식한 것이었을까?
---「마음을 열면 감정이 전해진다」 중에서
한 조사에 따르면 현재 반려동물로 길러지는 개와 고양이의 수는 900만 마리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반려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은 ‘펫산업’, 즉 동물을 물건 내지 상품으로 간주하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평균 330마리의 반려동물이 매일 버려진다고 하니, 이는 편리하게 구매했다가 필요 없어지면 버려도 된다는 생각이 만든 숫자일 것이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 1900~1980)은 ‘소유’가 “모든 것을 죽은 것, 다른 사람의 권력에 복종하는 것으로 변형시킨다”라고 말했다. ‘소유’가 대상을 ‘물건(thing)’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소유관계에서 소유의 주체와 대상, 그러니까 ‘나’와 ‘내가 가진 것’의 관계는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다. 이것을 소유관계는 죽은 대상, 즉 ‘물건’에만 한정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살아 있는 대상도 ‘소유’ 방식의 관계를 맺으면 죽은 것, 즉 ‘물건’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는 오직 대상과 죽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소유한다는 것’은 ‘대상’을 나의 물건으로 만든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서 ‘대상’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대상’이 무생물일 경우에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것이 생명체일 경우에는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생명을 지닌 존재를 물건처럼 취급하거나 심지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강아지를 ‘소유’할 수 있을까?」 중에서
수의사는 우리 모두가 생명의 고리 속에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직업이다. 동물이 처한 현실이 어떠한지 매일매일 경험하다 보면, 수많은 동물의 떼죽음이나 전염병과 같은 과도한 질병이 모두 우리 인간이 빚어낸 불행이라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노벨화학상을 받은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은 2000년에 지구환경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의무화하는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 개념을 제안하면서 큰 이슈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를 성찰하게 만드는 이 용어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지구 온난화와 환경 파괴 등의 문제가 인류 스스로 만든 문제라는 사실을 강조한 개념이다. 동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인류세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같다.
우리 인간은 생명의 고리를 인위적으로 끊거나 비틀면서 동물의 생명권과 환경권을 마음대로 결정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결국 자연 환경의 오염과 파괴로 이어지고, 당연히 우리 인간의 삶의 터전에도 위협을 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커다란 생명의 고리에 묶인 생명 공동체라는 점을 잊지 않는 일이다. 생명의 연대는 동물이 우리에게 던지는 아주 절실한 질문이다.
---「수의사가 꿈꾸는 생명의 연대」 중에서
최근 동물권 단체들을 주축으로 산천어축제가 사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반(反)생태적, 비인도적이고, 비교육적인 축제라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동물보호법 위반행위라는 이유로 고발장이 접수되기에 이르렀다. 산천어 축제는 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일까. ‘산천어’도 동물보호법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산천어 축제에 대하여 동물 학대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은 축제의 핵심인 ‘산천어 체험’이다. 산천어는 영서지방인 화천군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어종이다. 따라서 오로지 유흥·오락 목적의 이 축제를 위해서 영동지방에서 양식한 180만 톤(80만 마리)의 산천어를 무리한 운송 방식으로 공급받아, 5~7일을 굶겨 극도의 굶주림을 야기한 상태에서 얼음 속 밀집된 환경에 투입시킨다. 그러고는 하루 수천 명이 드리우는 얼음낚시 미끼를 물고 잡혀 죽거나, 훌치기바늘에 몸통이 찔려 올라와 죽거나, 혹은 극심한 고통과 스트레스 속에서 굶고 쇠약해져서 떼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럼에도 산천어는 동물보호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는 ‘식용을 목적으로 하는 어류’에 해당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무 문제도 제기할 수 없다.
이에 고발장을 작성한 변호사들은 이 사건에 동원되는 산천어들이 화천군수 및 주최 측이 주장하듯 예산이 부족한 지자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화천군을 홍보하기 위한 특정 목적 하에 인위적으로 양식된 것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즉 산천어 ‘양식’의 목적이 ‘식용’이 아니라 ‘유희용 또는 오락용’이라는 것이다.
---「법 없이 사는 동물은 없다」 중에서
인간 외의 다른 종에 대한 차별과 우위를 정당화하는 종차별주의는 인간만의 이성 능력과 해결 능력을 강조하는 사유에서 출발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생태계에서 동물과 식물보다 위에 있는 존재이다. 동물학자인 피터 싱어는 특히 계몽시대 이후 동물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기독교 교리가 17세기 초 데카르트의 철학으로 집중되어 나타난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사유와 언어능력이 지니는 압도적인 우월성을 강조하며, 동물은 언어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마음 없는 자동기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인간만이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영혼이 없는 동물은 쾌락이나 고통을 모두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내면이나 심리, 고통 자체를 부정하는 데카르트의 단호한 의견은 당대 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현대적 맥락에서 동물해방론은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84~1832)의 공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벤담은 인간처럼 동물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동물복지론*을 주장하는 벤담의 논의를 연결하여 본격적인 동물해방 논의를 펼친 학자는 피터 싱어다. 싱어는 수많은 동물실험과 잔혹한 공장식 농장의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익한지에 따라 동물을 제한적으로 배려하는 사고 자체를 바꾸자고 말한다.
---「반려동물에서 반려종으로」 중에서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동물들과 공존해 왔다. 하지만 도시화가 가속화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동물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자연이 아닌 도시에서 우리와 삶의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반려동물들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삶, 온전히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물은 인간에게 책임을 묻고 윤리적 태도를 요청하는 존재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동물의 요청에 응답하는 우리의 윤리는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윤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다. 특히 윤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규칙이나 규범을 이른다. 인간 개개인은 각자 다른 가치 기준과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윤리가 없다면 더불어 살아가기 힘들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동물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동물과 공존하는 인간의 윤리를 상상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이제 우리와 삶의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밥 먹고, 잠자고, 산책하는 반려동물들을 위한 윤리를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나아가서 식탁에 음식으로 오른 닭과 소와 돼지를 위해, 추운 겨울 꺼내 입은 패딩 속 깃털의 본래 주인인 오리와 거위를 위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신약을 먼저 체험하는 쥐와 토끼를 위해,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위해, 인간이 아닌 모든 동물을 위해, 우리는 윤리학을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난 타자 윤리학으로 다시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동물과 마주하는 윤리적 물음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