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방은 인성을 데리고 읍내 북쪽에 있는 매을미 마을로 달려 갔다. 연자방아 앞에 여러 사람이 모여 수런거렸다. “역병이 도는 거 아냐? 이런 날씨에 강 의원이 골골거리다 돌아가셨잖아.” “에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게. 역병이 돌면 우리 모두 다 죽네. 다 죽어.” 형방을 보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무리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형방이 연자방아 앞으로 걸어갔다. 인성은 가슴이 설레었다. 형방 뒤를 따라다니면서 불러 주는 대로 적는 게 전부지만, 어쨌든 처음 맡는 관아 일이었다. 연자방아 앞에 누런 황소가 쓰러져 있고, 타작하려던 나락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형방이 천천히 다가가 소를 살폈다. 인성은 옆에 바짝 붙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한참이 지났지만, 형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방이 소를 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소를 빌린 사람이 누구냐?” “저, 접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최 별감에게 논을 빌려 농사를 짓는 한 씨였다.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보아라.” 한 씨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모두 얘기했다. 듣고 보니, 마름이 한 얘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형방은 난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가 왜 죽었는지, 누가 잘못했는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형방은 인성을 한적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필묵통을 꺼내 편지를 적었다. “지금 가서 부사 나리를 모셔 와야겠구나.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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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닌다고 낮에 병자 방을 살피지 못했다. 차례로 돌다가 인희 방 안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안녕.” “왜 이제 와? 한참 기다렸잖아.” 토라진 목소리가 꽤 귀여웠다. 인성은 기다렸다는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자, 이거 받아. 미소 복면. 내가 만들었어. 어때? 한번 써 봐.” 빨간 실로 수를 놓은 복면이었다. 인성은 복면을 얼굴에 갖다 대고는 인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기 좋네. 모두 무뚝뚝한 복면을 쓰고 다니니까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잖아. 이렇게 방긋 웃고 다니면 얼마나 좋아? 매일 하나씩 만들어 줄 테니까 꼭 쓰고 다녀. 알았지?” “어, 그, 그래. 잘 쓸게.” 인성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리며 인희 방에서 얼른 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가슴까지 벌렁벌렁 뛰었다. 인성은 객사 마루에 걸터앉아, 인희가 준 미소 복면을 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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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았다. 오늘은 몇 명이더냐?” “열네 명입니다.” 침착하게 얘기하고 이방에게 일지를 건넸다. 약용은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방은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평소대로 병자를 모두 데려오시오. 나는 약방으로 가서 미리 준비하라 일러두겠소.” 약용의 목소리가 너무 침착했다. 인성은 신기하고 이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이 흔들리지 않고 차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약용이 천천히 걸었다. 인성도 약용을 뒤따라 걸음을 맞췄다. 약용은 약방으로 가면서도 일부러 먼 길을 택했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천천히 움직였다. ‘어! 내가 왜 따라가지?’ 인성은 잠시 주춤거리며 약용을 바라보았다. 약용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크게 느껴졌다. 진짜 약용처럼 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45
인성은 기둥 뒤에서 천천히 나왔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허 의원님을 많이 미워했습니다. 진실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허 의원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허 의원님이 저를 생각해서 하신 말씀은 나리가 곡산을 떠나실 때 대답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허 의원이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약용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도 두 의원님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약용은 마과회통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매을미 마을의 역병과 싸우면서 모아 두었던 모든 기록을 마과회통에 덧붙일 계획이었다. 정리가 끝나는 대로 두 의원에게 한 질씩 선물해 주기로 약속했다. “감사합니다. 의원에게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 의원은 약용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인성에게 다가갔다. “인성아, 미안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킬 때라고 늘 생각했는데, 나 스스로 내 자리를 지키지 못했구나.” 인성은 두 사람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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