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에 앉아 기타 줄을 튕기며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저녁 무렵 그림자처럼 길게 남은 회사 일에 관한 생각과 털어내지 못한 감정이 지우개로 지운 듯 희미해져갔고, 일로 퍽퍽해진 가슴에는 단비처럼 밝고 긍정적인 기운이 스며들었다. 내 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하나둘 늘어날 때 나는 공들여 즐거움의 세계를 하나씩 쌓아가고 있는 것 같았고, 동시에 내 삶의 운전대를 내 손으로 꼭 쥐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 pp.11-12 「프롤로그, 견디지 않고 즐기는 매일」 중에서
아르페지오 주법을 선호한 건 잔잔한 노래를 좋아하고, 아르페지오 특유의 부드러운 소리가 좋아서만은 아니고, 환경의 영향이었다. 바로 방음이라는 환경. 지금 살고 있는 빌라는 1993년도에 지어졌다는데 ‘음,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됐다고?’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낡았다. 층간 소음이 이슈가 되기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 것인지, 이웃 간에 따스한 정이 존재하던 시절이었어서 그런 것인지 방음에 유독 취약하다. 조용한 주말 아침, 침대에 누워 있으면 옆집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아이고, 너도 배가 고프구나. 나도 배가 고프다’ 하며 공감하게 되고, 윗집 청소기 소리에 ‘암만, 주말엔 청소지!’ 하며 나도 덩달아 청소기를 꺼내게 된다. 이런 소통 지향적인 환경에서 소리가 큰 스트로크는 가당치 않았다. 아르페지오는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 pp.51-52 「1장, 썸만 타다 끝날 줄 알았지만, 다행히」 중에서
윤딴딴의 노래는 당시 정식 앨범이 발매되기 전이었는데, 콘서트에 갔다가 기타 소리가 너무 좋아 유튜브에 올라온 ‘직촬’ 영상을 보며 정말 한 음 한 음 따서 연습한 곡이었다. 절대음감과 절대적으로 거리가 먼 나는 어떤 음을 듣더라도 이것이 솔인지, 라인지, 파인지 전혀 구별하지 못한다. 악보도 없는 곡을 카피하기 위해 나는 철저히 시력에 의존해 영상 속 손 모양을 보며 어떤 코드를 잡고 어떤 줄을 치고 있는지 하나씩 메모를 했다가 기타로 따라 쳐보며 맞는 소리를 찾아나갔다. 음악에도 노가다가 있을 수 있었다.
이전에도 그녀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연습한 부분을 들려주곤 했었다. 그녀는 아이가 엉금엉금 기다 뒤뚱뒤뚱 걷는 모습을 지켜보듯, 나의 느린 성장을 제법 대견하게 봐줬다. 하지만…… 그날 그녀의 표정은 차가웠다. 공들여 지도했는데 성적이 전혀 오르지 않는 학생을 마주한 선생의 얼굴이었다. --- p.71 「1장, 썸만 타다 끝날 줄 알았지만, 다행히」 중에서
발표회 이전에 사람들 앞에서 악기를 다룬 건 고교 시절 리코더 실기평가 때가 마지막이었다. 당시 나는 친구와 짝을 이뤄 리코더 합주를 해야 했는데, 그날 우리가 함께 만든 건 화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수’였다. 우리는 의좋은 형제처럼 삑사리를 여러 차례 주고받았고 강당은 개그 공연이 펼쳐진 양 웃음바다가 됐다. 부끄러운 평가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며 마음속에 악기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이구나 하며 모종의 빗금이 쳐졌는데, 십수 년 만에 사람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거기에 노래를 곁들인 발표를 하고 나니 어쩐지 마음에 그어진 무수한 선 가운데 하나를 지워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02 「2장, 혼자서는 재미없으니까, 기꺼이」 중에서
어디 가서 연주하고 뽐낼 실력은 아니지만, 이곳에는 나를 알아봐주고 나의 기타와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와 퇴근 후의 모습이 비슷하고, 자주 들어가는 네이버 카페와 유튜브 계정이 겹치며, 기타가 잘 쳐질 때의 기쁨과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의 짜증스러운 감정을 공유한다. 그렇게 공감과 관심을 재료 삼아 기타라는 세계에 작은 둥지를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바라보고 서로 알은체하며 서로의 소리를 들어준다. 기타의 세계에서 외로운 방랑자가 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살포시 잡아준다. --- pp.142-143 「2장, 혼자서는 재미없으니까, 기꺼이」 중에서
사무실에 앉자마자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적어두곤 정신없이 지워가기 바빴던 날, 열심히 진행해온 프로젝트의 중간 지점에서 갑자기 다른 방향을 이야기하는 상사나 빨리빨리를 외치는 동료 때문에 동해바다 같은 깊은 ‘빡침’이 찾아온 날, 그런 날에는 퇴근하고 방구석에 앉아 레퍼토리에 있는 곡들을 하나씩 연주해본다. 그렇게 한 곡씩 더듬더듬 따라가다 보면 배배 꼬인 감정이 조금씩 풀린다. 음악에 집중한 뇌는 고인 감정에 물길을 내주고, 기타 줄을 튕기며 피어난 흥겨운 파동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 p.178 「3장, 욕심이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아마도」 중에서
스트레스가 풀린다, 휴대성이 좋다,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같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놨지만, 뭐니 뭐니 해도 기타의 가장 큰 매력은 소리다. 기타 선율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에릭 클랩튼의 〈Tears in Heaven〉이나 이적이 리메이크한 〈걱정 말아요 그대〉 같은 곡을 들어본 적 있는지. 노래 시작부터 부드럽고 우아하게 울리는 기타 소리를 듣고 있으면 뭐랄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다. 그저 듣기만 해도 좋은 선율이 내 손끝에서 연주될 때 그 감동은 몇 배 더 커진다. 음악이 가진 본연의 힘에 성취감이니 만족감이니 하는 것들이 덧대어져 커다란 희열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소리를 내 기분과 상황에 맞춰 고르고 연주할 때, 그건 인생의 BGM이 되어 그 시간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 pp.204-205 「3장, 욕심이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아마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