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의도적으로 다양한 학제의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내용을 담았을 뿐 아니라, 각 장의 집필을 맡은 개별 학자들의 핵심 논조와 연구 접근법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본서의 목적은 하나의 접근법으로의 통합보다는 다양한 관점 및 접근법을 제시할 뿐 아니라,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건 및 의문점들을 각 장의 다양한 접근법에 적용 시도하는 데 있다. 만약 중동에 대한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역내 역사에 기반한 선별적 분석 접근 방법이 가장 유효하다는 것이다.
--- p.36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는 몇 개의 신생국가를 탄생시켰다. 유럽에 의해 획정된 국경 범주 내에서 이러한 신생국가들은 제국주의 세력의 엄격한 통제하에 국가 형성 과정을 거쳤다. 특히 신생국가들의 외교관계는 식민 세력에 의해 절연되었다. 정치 행위는 절대적으로 국내정치에 국한되었고, 국내정치는 독립 쟁취 문제에 매몰되었다. 독립을 위한 투쟁은 개별 국가에 기득권을 형성하였고, 이는 ‘대아랍 국가’를 열망한 대중의 요구와 상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획득한 거의 모든 중동의 신생국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과 비교하였을 때 결코 더 원만하게 국제외교 체제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아랍 국가 간 관계 역시 경쟁과 파벌 싸움이 극심해서 아랍연맹 같은 역내 기구의 힘은 미약하였고, 각 아랍 국가는 유엔 같은 국제사회 무대에서, 그리고 강대국과의 외교에서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 p.121
어쩌면 냉전이 증폭시킨 공산주의자, 또는 좌파에 대한 병리학적 두려움과 증오에서 비롯된 가장 불행한 결과는 세속적 저항운동이 중동 전역에서 지하조직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는 굉장히 위험한 것이거나 아부 행위로 전락하였다. 집권 세력에 대한 비판과 반대는 종종 반역 행위로 간주되어 법의 제재를 받았다(Makiya 1998; Sassoon 2012). 그 결과 이슬람 국가에서는 정부가 궁극적으로 모스크를 폐쇄하지 못하기 때문에 좌파 세력들은 다양한 종교 조직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는 냉전이 야기한 더 큰 비극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좌파 세력을 박해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집착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우선 매력적이지 않고, 대표성이 없으며, 정치적 특색이 없는 독재 권력이 유지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둘째로 종교 우파가 대두되어 이성적인 정강보다는 ‘이슬람이 답이다’라고 믿거나 그렇게 주장하는 통제될 수 없는 세력을 목도하게 되었다. 소련은 붕괴하였고 냉전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남긴 상흔은 중동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p.154
석유는 역내 세력 균형과 더불어 외부 세력의 향배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유가가 2004~14년 사이에 급속도로 오르자, 지대추구국가의 개혁 의지는 시들었다. 고유가 시기는 지역 수준에서 불안정을 야기하였고 쉽사리 봉합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주요 역내 정치적 분열 - 수니와 시아, 세습통치자와 온건 이슬람주의자(무슬림형제단) 간의 분쟁, 그리고 급진 이슬람주의자 간의 분열, 극빈과 거부 간의 균열 - 은 지대추구국가를 포함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나타났고 GCC의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지역 전반에 걸쳐 전개되고 있는 내전은 역내 국가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 p.247~248
민족학적으로 동질적인 아랍인 정체성은 ‘국가의 원형’을 구성하며 국가 설립의 필수 요소인 아랍 문화와 언어, 그리고 단합된 아랍 제국의 역사적 기억들을 공유한다. 이는 ‘한 민족 한 국가’라는 민족주의자들의 표준 규범에서 벗어난 ‘한 민족 여러 개의 국가’라는 생각을 아랍인들에게 심어 주었다. 그러나 아랍민족주의는 각각의 아랍 국가에 있어 지배적인 정체성은 아니었고, 그보다는 세대에 걸친 아랍 역사학자, 평론가, 정치인 들이 비아랍 국가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만들어 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아랍민족주의는 언제나 각 시기 다른 이익을 두고 대안 정체성과 경쟁 구도를 형성하였다(Gelvin 1997).
--- p.304
‘테러와의 전쟁’ 옹호자들은 교리적인 수칙에 귀의하여 이를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적들이나 잠재적인 도전자들과의 분쟁을 비정치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테러와의 전쟁’의 대상이 되었던 세력들은 역으로 폭력 사용을 재정치화하고, 이를 뒷받침하던 정당화를 뒤엎으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분쟁의 결과는 중동 내 안보 불안을 좌우하는 폭력의 정치화 및 비정치화에 따른 ‘낙인찍기’와 ‘대항적 낙인찍기’의 변증법이라고 볼 수 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분석은 미국의 분쟁 비정치화 노력이 정치적 전환 과정에서 등장한 ‘신이라크’ 내 사회적으로 소외된 세력의 급진적인 정치화에 의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보여 준다.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이란에 대한 ‘안보 문제화securitization’는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의 선별적인 ‘수치심 정치’가 어떻게 이란으로 하여금 ‘대항적 낙인찍기’ 정치를 활용하게끔 만들고 역내 영향력 확장에 나서게 하였는지 보여 준다.
--- p.463
아랍--- p.이스라엘 분쟁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가장 직접적인 ‘부산물’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에 벨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1917)을 끼워 넣음으로써 야기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의 열망과는 어긋나게, 유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시오니스트Zionist들의 열망을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랍--- p.이스라엘 분쟁과 팔레스타인--- p.이스라엘 분쟁은 수시로 교차되었고, 팔레스타인 문제는 종종 아랍 국가 간 경쟁, 그리고 아랍--- p.이스라엘 간 긴장감을 촉발하는 주요 요소로 작용하였다.
--- p.516
오슬로협정이 분쟁을 해소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리쿠드당에 의해 통치된 이스라엘이 협정에 대한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측의 경우 폭력에 호소함으로써 양측의 신뢰가 붕괴하는 데 기여한 측면도 있다. 특히 이러한 신뢰 부족 속에서는 정치적인 협상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양측의 신뢰가 무너지고 협상의 동력이 상실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스라엘 리쿠드당뿐만 아니라 노동당의 서안 지구 정착촌 확장 정책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이 팔레스타인 국가의 독립을 저해하였고, 이 문제의 해소 없이는 분쟁의 종식도 불가능하다.
--- p.600
아랍의 봄은 권위주의적인 아랍 국가 시스템의 부패를 드러내었다. 아랍의 봄은 정치적, 그리고 영토적인 측면에서 대부분의 아랍 국가를 그 근본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여러 국가의 주권 영역(영토, 정치체, 사회, 문화)은 아랍의 봄의 ‘여정’에 의해 고역을 치렀다. 즉 아랍 국가들(왕정 및 공화국 모두)이 ‘민족주의, 세속주의, 조합주의, 지대추구주의, 전통주의, 근대적 역할들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고(Korany 1987), 이러한 능력을 재생산함에 있어 근본이 되었던 ‘개념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은 새로운 상황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아랍의 봄 과정에서 드러난 갈등들(국가 대 국민, 중심부 대 주변부, 국내적 정치체 대 외부적 요인 간)은 국가를 건설하고 공고화한 탈식민 이후 역사 과정 어느 때보다 더 도전적으로 보인다.
--- p.6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