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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하게 철학하기

느슨하게 철학하기

: 철학자가 나이 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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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상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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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3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424g | 120*192*30mm
ISBN13 9791186561768
ISBN10 118656176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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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우리는 여행하며 가급적 경로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가능한 한 빨리, 스트레스 없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좋다고 여긴다. 이는 신체적 여행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거에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도서관을 찾아갔다. 지금은 스마트폰에 키워드를 입력하기만 하면 원하는 정보가 한순간에 뜬다. 검색 기술을 지탱하는 것도 경로 최소화를 지향하는 가치관이다. 하지만 이것이 옳은 가치관일까? 현대인은 바쁘다. 그러다 보니 경로의 최소화를 당연시한다. 리조트로 향하는 마음과 인터넷이 편리하다고 여기는 마음은 경로의 최소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통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인생으로부터 어떤 풍요로움을 앗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휴가라면 더더욱 그렇다. 휴가는 본래 효율성과 거리를 두고 뜻밖의 일(의도하지 않은 사고나 만남)을 즐기기 위한 시간이 아닐까?
--- 「휴가와 뜻밖의 일’ 중에서

나는 약간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가상 화폐는 주식을 운용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경험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가상 화폐 버블 상황에 경제 지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숫자가 오르느냐 내리느냐, 이것뿐이다. 거래 방법은 매우 단순하고 결과도 곧바로 알 수 있다. 게다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푹 빠질 수밖에 없는 게임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가상 화폐 거래는 투자보다 소셜 네트워크 게임에 가깝다. 게임으로 보아도 가상 화폐 거래는 잘 만들어진 게임이다. 중독성도 있다. 하지만 만약 가상 화폐 시장에 투자할 거라면 놀이를 즐기는 차원 정도로 임하는 게 좋겠다. 가상 화폐 투자는 게임처럼 보이지만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못 이해했다가는 비극을 초래한다. 나는 사흘 정도 스마트폰에 달라붙어 있다가 20만 6000엔에 무사히 팔고 빠져나와 일상으로 돌아왔다.
--- 「가상 화폐와 게임’ 중에서

소크라테스를 향한 비난을 요약하면 ‘너는 뭔가 믿기지 않아. 듣기 싫은 말을 해. 대중의 분위기에 따르지 않아. 그러니 죽어!’다. 범죄를 저지른 구체적인 증거는 없고 소문에 의한 감정의 폭주만이 존재한다. 현대의 SNS에서 곧잘 벌어지는 집단적인 몰아세우기와 똑같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은 극히 논리적인데, 무엇보다 자신이 논리로는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그는 사람들이 논리를 선택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논리’를 선택해 사형을 받아들였다. 플라톤은 이 ‘실패’에서 시작하여 만년에는 장대한 이상국가론을 설파한다. 그 시도의 함의는 240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퇴색하지 않았다. 인간은 논리적이지 않다. 대화를 쌓아간다고 해서 정의가 실현되지는 않는다. 모든 정치와 철학은 이를 전제로 시작해야 한다.
--- 「소크라테스와 포퓰리즘’ 중에서

이제 ‘광주 민주화 운동’은 현대 한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에 영화 [택시 운전사]도 흥행에 성공했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일본인들은 광주의 역사적 배경을 모를 것이다. 학교에서는 현대 한국사를 배우지 않는다. 역사 교육에서 현대사 비중이 가벼운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의 현대사를 다루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전지구적 사회에서 이 무지로 인한 폐해도 크다. 외교든 무역이든 현명한 선택을 하려면 상대방의 정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체성은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 「역사와 정체성’ 중에서

어려운 시기에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과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시간을 들여 그 사람과 함께한다는 말이다. 한 인간이 바뀐다는 것은 엄청난 일로 ‘좋아요!’를 누르듯 손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논쟁’으로 상대방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평생 동안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의 주변 사람뿐이며, 나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마도 이들뿐이다. 이 좁고 번거로운 인간관계를 얼마나 긴밀하게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이 인생의 풍요를 결정한다. 가족도 친구도 순식간에 만들 수 없다. 또 번거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변화가 가능하다. 번거로움이 없는 곳에는 변화도 없다. 정보 기술은 번거로움이 없는 인간관계를 형성해주었지만 이는 인간으로부터 변화의 가능성을 빼앗고 말았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어려움과 번거로움’ 중에서

오늘날 ‘평론’이라고 불리는 글은 꼭 이념이나 세계관 같은 전체성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도구라고 할까요? 따분한 일상을 매력적으로 꾸미고, 적당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글을 찾습니다. 지금 인터넷에는 그런 글이 대량으로 올라오고, 그 글에 수많은 댓글이 달립니다. 댓글은 또 다른 댓글을 불러오고 실명과 익명이 혼재한 채로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이게 블로그 논단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지난번에 잠깐 언급했듯이 이런 글은 기존 관점에서는 아예 평론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심 대상을 분석할 뿐(‘비인기非モテ’ ‘리얼충リア充’ 같은 속어가 그들의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알려줍니다) 커다란 이념이나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그곳에서 평론은 소통을 위한 떡밥에 지나지 않습니다. 1980년대식으로 얘기하자면 소비재일 뿐인 거죠.
--- 「전체성에 대하여 (2)’ 중에서

그렇다면 SF 대회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걸까요? 제 생각에 그 본질은 프로그램에 있지 않습니다. SF 대회에서는 심포지엄이 열리고, 교류회도 열리고, 수상자 선정 결과도 발표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없어진다고 해서 장르가 사라지지는 않지요. SF 대회의 중요성은 오히려 그것이 열린다는 사실 자체, 즉 몇백 명, 몇천 명의 SF 애호가들이 모여 1년에 한 번씩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SF를 좋아해!’라는 마음을 공유하는 ? 또는 공유했다고 착각하는 과정을 거치는 데 있습니다. 현대 사상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아시겠지만 이는 라캉이나 지젝이 자주 분석했던 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환상’이라는 거죠.
--- 「전체성에 대하여 (3)’ 중에서

그럼, 이 분류 가운데 문학과 비평은 어느 카테고리에 속할까요? 실은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라이프 스타일에는 여섯 가지 소분류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예술과 문화’라는 카테고리가 있고, 신간 서평이나 문학상 기사는 현대 미술이나 연극 기사와 함께 여기에 저장됩니다. 라이프 스타일에는 ‘예술과 문화’ 외에 ‘자동차’ ‘교육’ ‘음식’ ‘건강’, 그리고 ‘여행’이 있습니다. 물론 이 분류는 특정 사상을 기준으로 나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인터넷을 사용하는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죠. 그러나 이 소박함과 난폭함이 현재 문학과 비평, 혹은 더 넓게 ‘문화’의 위상을 사유하는 데 거친 통찰을 제시합니다. 이 분류가 의미하는 바는 현대 사회에서 문학과 비평은 새로 출시된 자동차의 디자인, 새로운 다이어트 방법, 연말연시 해외여행 등과 마찬가지로 생활을 꾸며주는 취미 분야의 화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잔혹한 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엔터테인먼트’조차도 아닌 거죠. 오락에도 끼워주지 않는 거죠. 엔터테인먼트의 소분류는 ‘예능’ ‘영화’ ‘음악’ ‘TV’ ‘코믹과 애니메이션’의 다섯 가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분류법에 따르면 문학은 영화보다 다이어트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 「오락성에 대하여 (1)’ 중에서

논단지나 문예지에 원고를 써도,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신문의 논단 시평을 담당해도, 이를 통해 다소 명예와 재산을 손에 넣어도, 나는 항상 ‘이것은 진짜 인생이 아니다’ ‘진짜 현실은 여기에 없다’고 느꼈다. 그런 일을 할 때 내 주변은 온통 몽롱해서 마치 다른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는 것 같았고, 지금이라도 바로 리셋(reset)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나와 현실 사이에 항상 반쯤 투명한 막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는 매우 유치한 감각이다. 나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치함을 자각했다고 해서 그 감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20대와 30대의 20년 동안 줄곧 이 유치한 위화감 때문에 괴로웠다. 이는 겐론을 시작할 때까지 이어졌다. 왜 겐론을 만들었느냐?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에 답한다. 대학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출판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TV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인터넷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이쪽이 더 자유롭고 즐거우니까……. 모두 거짓이 아니다. 비평은 자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학과 출판은 더 이상 자율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겐론과 같은 운동체가 등장하는 것은 비평사의 필연이라고 느낀다. 나는 이 필연을 구현한 것뿐이다.
--- 「겐론과 외할아버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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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좋을 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병에 걸리거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고, 소중한 사람을 잃기도 한다. 그런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가 도와줄까?

“가족, 친구 등 번거로운 작은 인간관계 밖에 없다”고 『느슨하게 철학하기』에서 아즈마는 말한다. 직접 자주 만나 시간을 공유하고, 서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깊은 관계에서만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장소가 현대 사회에는 별로 없다. 직장에서는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야 한다. 인터넷에서는 많은 사람이 금방 모이지만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도망간다. 왜 이렇게 살벌한 세상이 되었을까?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신체를 망각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 해답일 것이다.

신체란 원래 번거로운 법이다. 냄새 나고, 땀나고… 무언가를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데이터화된 말은 번거롭지 않다. 지저분하지 않고 순식간에 먼 곳까지 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데이터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타자의 번거로운 신체를 배제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민, 장애인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 배제는 결국 본인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늙고 병약해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아즈마는 “사회에서 신체를 되찾자”고 주장한다. 신체는 모든 것에 파급된다. 아즈마는 “땅의 높낮이 차는 소득격차와 연관된다”며 도쿄의 지형이라는 신체를 포착한다. 부서진 원자력 발전소로 ‘관광’을 가서 과학자의 설명에서도, 언론 보도에서도 볼 수 없는 원자력의 ‘신체’를 발견한다.

아즈마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친구와 적으로 확연히 갈려 서로의 의견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고도로 인터넷화 된 현대 사회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신체를 기반으로 사람이 해후할 수 있는 장소를 다시 만들고 싶어서가 아닐까. 아즈마가 시간제한 없이 게스트와 대화하는 ‘겐론 카페’를 만든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 도코 고지 (와세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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