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산책, 경주를 거닐다
그 많던 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김임미
일상과 일상 밖이 그립다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해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위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들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 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국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혈기방장한 시절 유행가처럼 옆에 끼고 있던 김수영의 시다. 이 시를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늘 ‘여행’을 떠올린다. 목적지 없는 여행을 명령받은 발목 묶인 나! 이 숙명의 여행에서 자유로운 자가 어디 있을까. 애써 숨겨온 속내를 들켜버린 듯, 이토록 저릿한 갈구를 보고 있자니 메마른 산정을 헤매는 어중간한 나이의 가장이, 아니 올라갈 수도 내려올 수도 없는 우리의 모습이 정수리에 꽂힌다. 내가 아는 한 이 시는 코앞에 버티고 있는 일상과 그 불락의 일상에 대한 끈질긴 초월 욕망의 역학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시다. 고질이 된 코로나에 지쳐 팍팍한 이때, 이 시를 다시 꺼내어 읽으니 문득, 요사이 우리가 꿈꾸는 것이 일상과 일상 밖 그 모두이구나 싶다. 일상 같은 일상을 누리지 못하니 일상도 판타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요즘, 간절히 일상과 일상 밖으로의 탈출 여행을 함께 꿈꾸어 본다.
사슬에 묶인 구름의 파수병이 반역의 여행을 꿈꾸지 않을 재간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씁쓸한 수학여행의 추억
1977년 가을의 어느 날, 수양버들이 늘어선 대구 남구 한 국민학교의 커다란 운동장에 모여 우리는 경주로 떠날 관광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수학여행에 한껏 들뜬 마음으로 아이들은 재잘댔고, 양복을 차려입은 선생님들은 연신 아이들에게 열과 오를 맞추라고 소리 지르기에 바빴다. 한 반에 평균 65~67명 정도의 학생이 14반까지 있었던 우리 학교의 6학년 학생 중에는 수학여행을 함께 가지 못한 아이들이 7~8명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이 수학여행 경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이었고 간혹 장거리 여행이 마뜩잖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때도, 중·고등학교 때에도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창밖으로 보거나 듣거나 하면서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던 것 같다. 그때 그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이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그저 그 광경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으으 어떡하지... 집에 가면 안될까... 우르르 내몰리고 이리저리 부대끼는 것이 싫었던, 그저 웅크리고만 싶었던 사춘기 소녀 시절이었나 보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으로 묘해서 그때의 그 난감하고 용쓰던 기억은 경주와 수학여행에 대한 기억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에게는 들뜨고 설레는 여행이었을 그 수학여행이 나에게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별 추억거리가 생각나지 않는 여행이 되었다.
수학여행은 여행이 귀하던 시절 학습을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 근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록상으로는 1901년 황성신문에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1902년에는 ‘수학유람’이라는 용어도 쓰였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1886년부터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쓰였다고 하니 일본에서 수입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2019년 경기도교육청은 학교와 시·군 교육지원청 등을 대상으로 한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발굴을 위한 조사’를 통해 이 수학여행이라는 용어를 일제 잔재 용어로 제시했다. 경기도교육청은 수학여행이 일본, 만주 등에 조선인 학생들을 보내 민족정신을 해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 기원과 상관없이 수학여행이 일본 제국의 문화적 식민화 통치술로 기능한 것은 사실이었다. 1899년 경인선의 개통으로 단체 여행과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수학여행 인원이 많게는 800명인 학교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수학여행은 주로 경성, 평양, 개성, 경주, 수원, 부여, 강화 등 역사유적이 많은 곳과 인천, 진남포, 신의주, 원산 등 공업시설이 많은 곳으로 갔다. 그러다가 1930년대 역사유적지나 근대적 시설 외에도 만주 러일전쟁 전적지와 산업시설, 일본의 근대적 건축물과 신사 유적지 등이 수학 여행지로 선정되었다.
경주는 일제 강점기에도 국내 수학 여행지로 인기였다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 석굴암 보수를 졸속으로 끝내고 경주역과 불국사역이 각각 1918년, 1919년에 노선을 운항하기 시작한 후, 경주는 일제의 문화적 선전도구 역할을 했다.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는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일본의 식민지 문화유산으로 귀속되었고, 경주의 문화유산은 일본의 나라(奈良)에 그 뿌리를 둔 것으로 교육되었다. 물론 의도와 정반대로 수학여행은 민족의식 고취의 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주에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위한 편의시설, 집단 수용시설, 숙박시설이 갖춰졌고 이러한 시설과 설비는 해방 이후에도 경주를 여전히 인기 있는 수학 여행지로 부각시켰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유명 관광지로서 경주의 위상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국민 정서 함양 프로젝트가 가동되었고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1979년 보문단지가 개장되었다. 유적, 문화재, 역사를 탐방하기에 충분한 내용물을 갖춘 경주는 관광·여행지로 안성맞춤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