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원제목은 즉 “아버지”이다. 원제목만 보면 독자는 이 책을 아버지에 관한 책이나 아버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조금 일반화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동양권과 마찬가지로, 서양권에서도 아버지는 어머니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먼 존재이자 잘 알지 못하는 존재이다. 아버지에 관한 내용은 문학 작품에서부터 정신분석학이나 분석심리학 문헌에서도 그렇게 많이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제목까지 단 이 책에는 “아버지”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내용이 나오리라고 기대할 독자도 많을 것이다. 그것이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보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그의 딸과 아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가 그의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고찰한 책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아버지라는 존재에 온전히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에게 초점을 맞추고 난 지점에서 아버지를 바라본 책, 아니 연구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판의 제목은 “아버지와 부성 콤플렉스: 최근 융학파의 관점에서”라고 하였다.
역자도 앞서 언급하기도 했고, 이 책을 편집한 새뮤얼스도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정신분석학이나 분석심리학 문헌에서 아버지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어머니는 “대지모”나 “태모”, “충분히 좋은 어머니”나 “젖가슴”, “아이를 잡아먹는 어머니”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개념들로 소개되고 설명되는 반면, 아버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또는 토템과 터부)에서나 겨우 그 존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조차 그는 어머니와 연관 지어져서 소개된다. 그의 존재 가치는 어머니-유아 사이를 “갈라놓는” 존재, 아이와 어머니의 분리를 돕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중개로 아이에게 소개된 이 제3자는 이제 아이에게 멀고 먼 법과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 하늘-아버지로 존재하게 된다.
열 달 동안 태내에 아이를 품고 있다가 그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존재이자 그가 세상에 나와서 처음 만나는 대상인 어머니가 인간의 정신 발달에 있어서 실제로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어머니에 관한 연구가 더 많은 이유에는 분석심리학자들의 창시자들부터 해서 그 분야의 거장들이 대부분 남성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오래된 개인적인 생각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아버지가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내려온”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쯤에서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이 30년, 40년 전에 쓰여졌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이 논문들이 쓰여진 무대가 되는 서양권까지 가지 않고 우리나라의 예만 보더라도, 약 이,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린 시절 그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해서, 그가 잠든 후에나 귀가하는 존재였다. 과장을 조금 섞어서 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저 사람은 집에 들어오면 왜 항상 누워 있어?” 또는 “아빠는 왜 항상 집에서 잠만 자?”라는 의문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새뮤얼스가 30년, 40년 전에 언급했던 “새로운 남성”, 아이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생긴 “새로운 아버지”가 등장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30년, 40년 전에 쓰인 논문들을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우리가 경험한 아버지들을 대상으로 한 고찰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전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부재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는 오히려 지나치게 현존하는 일이 많았다고 말할 수 있다. 현실의 인물이 아닌 “상상” 속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는 신화에 나오는 크로노스나 제우스,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다. 나의 현실의 삶에서 실체를 만날 일을 그리 많지 않았지만, 실체 없는 큰 힘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논문들은 그런 아버지의 이미지를 조금 더 아래로 끌어내려서, 그를 우리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시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를 주제로 한 만큼 이 책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지워진 편이다. 아마 이 후에 나와야 할 연구들은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아버지, 우리의 실제 생활로 더 “내려온” 아버지에 대한 것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이전처럼 가정에만 머무르면서 아이의 양육에 헌신했던, 그 정체성이 “모성”에 집중됐던 기존의 어머니들과 비교해서 아이의 삶에서 조금 떨어져서 자기 자신으로 살게 된 어머니, 이 둘이 만들어낸 새로운 균형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지만, 우선 아버지이다. 이 책은 그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먼저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역자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