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수 교수. 내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구수한 된장국 같은 친구다. 그가 이순(耳順)을 앞두고 수필집을 낸다니 가슴 뭉클하다. 그리고 먹먹하다. 빼어난 문학작품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이 요동친다. 왜냐하면 이 수필집의 바탕을 이루는 글은 그가 고등학교 때 쓴 일기기 때문이다.
한 소년의 삶의 기록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시대의 아픔과 한, 그리고 극복의 몸부림이 명료하게 읽힌다. 무엇보다 그가 옮겨놓은 곡진한 이야기 몇몇은 거침없이 내 눈물샘을 자극했다. 흑백사진이지만, 아름답다. 따뜻하다.
--- p.7, 「추천사」 중에서
행여, 힘들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이 글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거나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동시대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공감의 추억이 될 수 있다면 하는, 그런 작은 소망도 가져 본다. 더하여, 혹시 젊은 청년들이 이 책을 읽게 되면 부모와 기성세대들을 좀 더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 p.13, 「머리말」 중에서
병약한 몸으로 나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신 아버지께서는, 정말 효도를 다 하고 싶었던 나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내가 해양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첫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 입항을 5일 정도 앞두고 돌아가셨다. 배의 통신사를 통해 아버지 부음(訃音) 전보를 받아 들고는 정말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시고, 이제 그 자식으로부터 편안한 호강을 한번 받아볼 수 있게 되었는데 돌아가시다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한 번 바다에 나가면 아버지 임종뿐만 아니라 상(喪)도 치를 수 없는 뱃사람을 ‘상놈’이라 부르는 의미가 그때 처음으로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즈음에, 형의 둘째 조카가 태어났다. 그 넓은 바다를 바라다보며 생각했다. 하늘이 헌 생명을 거둬가고 새 생명을 주는구나.
살아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죽어서야 그 존재감이 드러나는 슬픈 이름 ‘아버지’, 작고한 아버지 나이 근방에 와 있는 나도 지금, 이 나이에도 아버지가 그립다.
--- p.26~27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써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평생 회한이 남는 한 가지가 있다. 아버지께서는 살아 생전에 “내가 살아온 것을 글로 쓰면 리어카 두 대 분량은 될 것이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물론 과장법이지만 그만큼 고생을 많이 하셨고 할 얘기가 많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래, 어떻게 살아오셨어요? 그 힘든 세월을…”이라고 물어준 적이 없다. 리어카 두 대 분량의 일기를 못다 쓴 그 한(恨) 많은 세월을 당신의 가슴에만 새까맣게 다 묻어둔 채 홀로 쓸쓸하게 저승길로 떠나셨다. 그때 제대로 물어 주지 않은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도 한 번도 묻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또 ‘내리사랑’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리운 나의 아버지!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내 꼭 다시 묻고 들어 주겠다. “그 힘든 길을 어떻게 살아오셨어요?” 그때는 아버지께서 숨도 아기처럼 편하게 쉬시며, 약 걱정 없이 하고픈 얘기 다 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희생과 사랑 덕분에 막내 아들이 잘 자랄 수 있었다고, 그래서 참으로 고마웠다고, 그리고 너무너무 보고 싶었고 사랑한다고 말하리라.
--- p.37
참으로 부지런하셨던 어머니는 잠시도 쉬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농번기 때가 아니면, 또 배추 등 채소를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낙동강 근방 큰 재배단지에서 채소를 떼다가 시장에 내다 팔곤 했다. 가난한 시골 마을의 다른 어머니들도 많이들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마을의 친구 또래들과 동구 길 근방에서 반딧불 등을 잡으면서, 시장 간 어머니가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에 내리길 기다리곤 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거의 항상 제일 늦게 온 기억이다. 다른 친구 또래들은 자기 어머니가 버스에서 내리면 신나게 손을 잡고 마을로 사라졌는데, 나는 어머니와 같이 온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다림에 지쳐 결국 혼자서 내려와 잠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들어 있으면 뒤늦게 도착한 어머니는 잠든 막내 아들 입에다 시장에서 사 온 빵을 물려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반쯤 잠든 상태에서도 그 빵을 맛있게 씹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빵 맛은 죽을 때까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빵은 바로 어릴 때 엄마의 단 젖과 같은, 나를 이만큼 키운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 p.45~46
1979. 9. 27. 목. 맑음
아침 5시경. 잠이 깊이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부엌에서 흐느끼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일어나서 가보니 아버지께서 신세타령을 하고 계셨다. 그 우는 소리가 너무 구슬퍼서 나의 가슴도 금이 가는 듯하였다.
엄마도 없는 집안 거기에다가 병든 아버지께서 저렇게 우시니 정말로 비참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이불을 안고 한없이 울었다. 조금 있으니 대문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누나가 들어왔다. 얼른 눈물을 닦았으나 아버지께서는 계속 우셨다.
누나는 동목이 이야기를 좀 하다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도저히 눈물이 나 참을 수가 없었다. 누나를 안고 둘 다 엉엉 울었다. 형은 작은방에서 잠만 자고….
***
누나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했다. 어머니 없는 우리 집안에서 누나라는 존재는 아버지에게나, 나에게나, 그리고 형에게도 집안의 큰 대들보처럼 엄마 같은 역할을 해줬다. 아버지께서는 일만 생기면 누나한테 가보라고 하셨다. 또한 누나는 가난한 집안형편과 친구를 좋아하는 나의 성격을 배려하여, 기죽지 않고 꾸밈없이 고교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때맞춰 적당한 용돈도 주곤 했다.
정말 우리 누나가 없었다면, 나의 정상적인 고교 시절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 p.64
형이 입대하기 전에 내게 준 용돈으로 나는 고교 시절 테니스 라켓을 사서 테니스를 많이 쳤는데, 형은 어른이 되어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형은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발달한 데다 후천적인 꾸준한 노력의 합으로 아마추어 테니스 선수로는 전국 최상급이 되었다.
내가 서울에 살 때 형이 일산 부근으로 테니스 시합을 온다고 했다. 형이 온다고 하기에 당연히 응원도 할 겸 구경을 갔다. 그 시합은 윌슨(Wilson) 코리아에서 주최하는 전국 아마추어 동호인 테니스 대회였다. 형은 남자 복식 경기에서 지역 예선을 통과하여 본선까지 진출했다. 결승전까지 갔지만 아쉽게도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형이 테니스를 잘 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정상급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 형은 한 인생을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다. 물론 학창시절에는 가난한 가정형편 등으로 공부를 많이 할 수 없었다. 또한 해병대를 나온 치기 어린 젊은 시절 사고도 많이 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그 무엇이든지 소속된 분야에서 정말 열심히 하여 성취를 하고 인정을 받고 하는 모습의 형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성실한 가장으로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사회인으로 자리잡게 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 고생한 형수의 지혜로운 내조가 있었음을 잘 안다. 존 맥스웰은 “리더십의 최고봉은 가족 리더십”이라고 했다.
나도 불혹의 나이가 되어 기업교육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 세상을 많이 다르게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런 내게 비친 형의 일상적인 모습은 늘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며, 남을 충분히 배려하고, 먼저 이해하려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하게 보였다. 그 전에도 그러했을 터인데, 내가 부족하여 잘 보질 못 했을 뿐이다. 형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 형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 p.80~81
인연(因緣)보다 더 묘연한 것이 또 있을까? 은주 누나와는 양 집안끼리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우리 누나와 은주 누나의 언니가 서로 어려울 때, 직장에서 만나 언니 동생으로 연을 맺어 의지하고, 집안을 오가며 잘 지낸 것이 나와 은주 누나로 내려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은주 누나의 동생이었던 은희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되어 있고, 은주 누나는 처형으로 연(緣)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당시 우리는 서로 양 집안을 오가며, 가족처럼 왕래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또 잘 지냈다. 내가 은주 누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아주 적었다. 하지만 은주 누나는 거의 매 주말마다 우리 집에 내려오곤 했다. 방학 때는 평일에도 올 수 있어서 더 자주 왔다.
***
1979. 9. 16. 일. 맑음
저번 주까지 작은방 큰방 부엌 등 집수리를 하느라고 시간을 많이 빼앗겼다. 그래서 이번 일요일은 누나와 얘기하며 재미있게 보내려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뒷간을 수리할 작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른 아침부터 일에 얽매였다. 모두들 추석을 앞두고 집수리 하느라 한창이다. 이래서 명절은 생활에 리듬을 준다. 정말 우리의 민속 명절은 좋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일에서 보람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오전에는 누나가, 오후에는 또 은주 누나가 내려와 집 청소하는 데 많이 거들어 주었다. 정말 누나들의 그 고마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은주 누나. 나에게 원기를 주고, 꿈을 가지게 하고, 불행할 땐 위안을 주고, 정말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천사 같은 누나다. 누나 정말 고마워.
--- p.273~274
나의 고교1학년 일기장은 절친이었던 철희가 선물했고, 2학년 일기장은 은주 누나가 선물했다. 결과적으로 두 일기장의 기록이 있었기에 나의 고교 시절은 생생하게 되살아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가치를 가격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정말 무한 감사할 따름이다.
그 일기장 서문에 써 놓은 누나의 글이 내게는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 같다.
은주 누나는 형의 해병대 입대 전야제 때도 내려와 밤새워가며 고생했는데, 형이 진해 신병훈련소 훈련을 마치던 날 가족 면회를 갈 때도 전날 밤을 함께 지새우고 또 함께 면회를 갔다. 은주 누나와 함께하길 그렇게 고대하던 어쩌면 나의 첫 번째 여행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은주 누나와 둘만이 여행가는 꿈을 꿨었는데, 그것을 이루진 못 했지만 가족과 함께 형을 면회 간 여행의 추억이라도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 p.290
지난 고교일기를 40년 만에 다시 보고 정리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즉, Why를 아는 사람은 How를 찾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에 살았던 유대인 정신과 의사였는데,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포로수용소에 끌려가 약 4년간 살았다. 그 지옥 같이 처참한 환경 속에서 빅터 프랭클은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들은 “절대 죽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반드시 살아 나가서 우리 가족을 만나야 되거든요”였다.
즉,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그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견디는 힘이 생겨나더라는 것이었다. 또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꿈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나를 원하는가?’ 하는 의미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원제는 『Man’s search for meaning』 즉 『삶의 의미를 찾아서』이다.
당시 나의 꿈들도 중요했지만, 아버지께서 나의 성공을 간절히 원했고, 동문장학회가 나의 회장 역할을 원했다. 또 가족 친구들 그리고 나의 수호천사, 은주 누나가 나의 건강한 삶을 원하고 지지해 줬다. 그래서 나는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에도 새롭게 생긴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사회가 나를 원했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삶의 의미의 원천이었던 그 모든 분들에게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 p.378~379, 「이 글을 마치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