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는 모든 인간 실존의 세 가지 근본 관계, 즉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인간에 대해, 그리고 세상 가운데 서게 될 것인지 선명하게 규정한 고유한 출발점을 가리킵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관계에 대해, 인간은 모든 사제직이나 교회를 배제한 영원하신 존재와 직접적인 교제를 갖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따라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정부(政府) 앞에서 동등하며, 각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한 봉사 가운데 서서 하나님이 그 봉사를 위해 주신 은사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해, 온 세상 가운데 저주는 은혜로 말미암아 억제되었고, 세상의 삶은 독립적으로 존중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과 세상의 삶 가운데 두신 보화들을 모든 영역에서 발전시키는 한편, 세상의 맹독(猛毒)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더욱 고상하고 진지한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칼빈주의가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조건들을 충족하며, 이교, 이슬람교, 로마교, 그리고 현대주의 가운데 나타난 강력한 삶의 발전된 형태들과 나란히 포괄적인 삶의 체계에 대한 고유한 원리가 된다는 것을 논란의 여지없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강연 - 역사 속 칼빈주의」중에서
종교는 인류 전체와 연관됩니다. 이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예술 작품입니다. 따라서 이 인류 전체는 늙은이나 젊은이나, 낮은 자나 높은 자나, 헌신된 자나 그렇지 않는 자나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전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택함 받은 일부만이 아니라 ‘일반 은총’(gemeene gratie)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비추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교회 안에 집중되는 것이 있지만, 이 교회의 벽에는 창문이 있고, 영원자의 빛은 그 창문을 통해 온 세상에 비췹니다. 여기 산 위에 있는 한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는 모든 사람이 멀리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소금이 있는데, 이 소금은 모든 것에 스며듭니다. 비록 이 높은 빛을 받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똑같은 단호함으로 모든 일 가운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고 요청을 받습니다[마 5:13-16]. 모든 부분적 종교는 삶에 이원론의 쐐기를 박지만, 칼빈주의자는 일원론적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은 반드시 하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했듯이 그가 모든 것을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종교의 반대 이미지로서의 죄조차도 이 일원론에서 배제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강연 - 칼빈주의와 종교」중에서
제 주장의 주된 목적은, 어떻게 칼빈주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리와 주권적 권위를 사회적 삶의 영역들에서도 유지하도록 하는지, 어떻게 국가의 막강한 권력에 저항하고, 현존하는 법률 위에 그리고 그 법률 밖에 그 어떤 권세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끔찍한 생각에 저항하도록 하는지, 어떻게 군주의 호의로 인한 결과 외에 그 어떤 헌법적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절대주의의 교만에 저항하도록 하는지, 여러분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범신론의 등장으로 극히 위험하게 변질된 이 모든 세 가지 개념은 우리의 시민적 자유를 죽이고 있습니다. 칼빈주의는 국민의 폭력이나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망상에 호소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권리와 자유를 정부의 높은 권위가 흘러나오는 동일한 원천,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 이끌어냄으로써 이 절대주의적 흐름에 하나의 댐을 건설했다는 영예를 받습니다. 가정과 사회적 삶의 각 영역의 영역 주권은 국가 권위의 지배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이 하나의 원천으로부터 직접 흘러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주권은 서로 이해해야 하며, 자신의 주권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위엄을 섬기는 신성한 의무에 있어서 동일합니다.
---「세 번째 강연 - 칼빈주의와 정치」중에서
모든 학문에는 체계가, 모든 교육에는 일관성이, 모든 교육기관에는 통일성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오직 자신의 고유한 원칙에 엄격하게 매여 모든 부자연스러운 속박을 벗어 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칼빈주의가 우리에게 길을 열어준 덕분에 학문의 자유 또한 다음 두 가지 조건 하에서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첫째, 모든 원리는 고유한 학문을 자신의 뿌리로부터 번성케 할 권세를 추구한다. 둘째, 모든 눈에 시야를 열어주지 않는 한, 그리고 학문의 문장(紋章)에 새겨진 황금 문자로 학문이 그 힘을 얻고 살아가는 목적이 되는 원리를 비치지 않는 한, 그 어떤 학문도 영광스럽게 머리를 들 수 없다.
---「네 번째 강연 - 칼빈주의와 학문」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칼빈주의 전체 방향에 대한 출발점이자 여전히 출발점으로 머문다면, 예술은 ‘악한 자’(Booze)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사탄은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한 은사들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술은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부여하신 힘과 은사들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며 여전히 주권자시라면, 예술은 하나님이 최고의 예술가로서 친히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이 세상에 정하신 규례를 따르는 것 외에는 매력을 끌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권자시며 여전히 주권자시라면, 그분은 이 은사들을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시되, 아벨의 후손이 아닌 가인의 후손에게 먼저 나누어 주시기조차 하십니다. 이는 예술이 마치 가인의 후손에게 속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범죄하여 최고의 은사들을 내버린 자가 최소한 더 낮은 예술의 은사들 가운데, 칼뱅이 아주 아름답게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증거를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섯 번째 강연 - 칼빈주의와 예술」중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종교적으로 매우 낮은 상태이며 영웅적 열정을 상실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보내시지 않는다면, 방향 전환은 없을 것입니다. 시대의 물줄기는 두려울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 버립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사람들이 창가에 놓아 바람을 통해 하늘의 멜로디가 연주되는 아이올루스의 하프(Aeolusharp) 역자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하프로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면 저절로 소리가 나는 현악기를 가리킨다.
를 알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한, 이 하프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분다 할지라도 하프가 준비되어 있지 않는다면, 그 바람이 불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들을지라도 감미로운 음악은 들을 수 없습니다. 칼빈주의가 다름 아닌 그런 아이올리스 하프라고 칩시다. 칼빈주의 역시 주의 성령 없이는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것을 고백합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를 위한 이중적 소명이 흘러 나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령의 바람이 불도록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하프가 완벽하게 조율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시온의 창가에 구비되어, 성령의 바람이 다시 불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여섯 번째 강연 - 칼빈주의와 미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