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만 년 전, 최초의 영장류 가운데 일부가 아프리카를 떠나 남아메리카에 당도했다. 그들이 바다를 항해했다는 것은 쉽게 믿기지 않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물론 자발적인 이주는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널리 인정되는 가설에 따르면, 이 영장류는 자연스레 형성된 커다란 뗏목을 타고 아프리카에 있는 큰 강의 하구로 떠밀려왔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식물 빙산들’이 우연히 동물들을 태우고 남대서양을 횡단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게다가 3000만 년 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의 거리는 오늘날보다 훨씬 가까웠다. 아소르스제도와 카리브제도를 통하든, 아프리카 남부, 북극해 서부, 파타고니아를 통하든 해류 또한 순조로웠다.
---「2 물과 땅: 해면에서 인간까지」중에서
유대인들에게 물은 생명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위협이었다. 하느님은 자신의 권능을 바다 위에 펼치거나 바다를 통해 드러냈다. 대홍수 이야기에서 노아는 그리스의 난파선 이야기에서처럼, 일종의 ‘상자’ 안에 들어가 살아남는다. 홍해가 갈라진 이야기는 인간 구원을 나타내는 은유였다. 요나라는 인물은 풍랑을 잠재우려는 뱃사람들에 의해 바다로 던져져 커다란 물고기에게 삼켜졌지만 며칠 뒤에 풀려났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보듯, 바다는 하느님이 부여한 시험의 장소였다. 인간은 이 시험을 이겨내야만 자유인의 조건에 이를 수 있다. 바다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성경에서 묘사하는 여러 괴물 중 가장 무서운 레비아탄은 바다에 살았다.
---「3 인류 최초의 항해」중에서
이 시기(15세기 후반)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새로운 선박을 고안해냈다. 카라벨라라고 불린 이 작고 가벼운 배는 이물에 작은 삼각돛을 달고 2개의 사각 돛과 1개의 라틴 돛(직각삼각형 형태의 아주 큰 돛)을 설치해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고, 따라서 탐사 여행을 떠나기에 이상적인 이동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재산 관리를 제노바 상인들에게 맡겨둔 이베리아반도의 다른 이웃과 마찬가지로 상업적 야망은 없고 종교적 열정만 지니고 있었다. 즉 원주민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새로운 지리적 발견에 나선 것이다. 포르투갈은 안트베르펜을 이용해 무역을 했고, 포르투갈의 북유럽 수출을 보장하는 창고들을 그곳에 설치했다. 그리고 유럽 너머 미지의 땅을 찾아 떠나는 임무를 맡기 위해 그리스도 기사단〔1319년 포르투갈의 시인왕 디니스 1세에 의해 창설된 기사수도회〕을 발전시켰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당시 해양 지도는 여전히 엄격한 비밀 자료로 유지되었다. 배가 난파될 경우 물에 가라앉도록 지도에 납덩이를 달아두었을 정도였다.
---「4 노와 돛을 이용한 바다 정복」중에서
한편 또 다른 주요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제 바다를 통해 화물과 여객만을 운송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은 금융 정보들이 전달되었다. 사람들은 전서구(傳書鳩)나 시각적 전보 신호를 사용해 사흘이나 걸려서 파리 주식시장에서 런던 주식시장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데 만족할 수가 없었다. 해법은 바다에 있었다. 1850년 8월, 영국인들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해저 전신 케이블이 칼레와 도버 사이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 케이블은 불과 11분 만에 끊어져서, 이듬해인 1851년 11월 30일 케이블이 다시 설치되었다. 이로써 메시지 전달 소요 시간은 (사흘에서) 한 시간으로 줄었다. 이 케이블은 이후 40년 동안 작동하면서 주로 주식시장 정보를 모스 부호로 전달했다. 해저 전신 케이블은 세계 경제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모든 사람이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리라고 예감했다. 영국은 점진적으로 전신 케이블을 설치해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연결했다. 주로 금융 정보를 모스 부호로 주고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런던의 권력을 장기간 지속시켜줄 사회 기반시설이 자리를 잡았다.
---「5 석탄과 석유로 정복된 바다」중에서
1940년 봄이 되자, 영국군은 1914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군이 북해와 대서양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하지만 1940년 5월 프랑스군이 패주하면서 영국군 역시 어려움에 봉착했다. 영국은 구축함 39척과 소해정〔기뢰 등 위험물을 제거하는 배〕 여러 척을 비롯해 민간인 요트와 어선까지 보내어 33만 8226명의 병사(프랑스 군인 12만 3000명 포함)를 됭케르크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독일은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곧이어 메르엘케비르〔알제리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영국군이 프랑스 함대를 파괴했으며, 툴롱에서는 프랑스군이 스스로 자국의 함대를 파괴했다. 따라서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도 이들 함대를 이용할 수 없었고 대서양, 발트해, 지중해, 어느 바다도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독일은 아시아로 눈을 돌려야 했다.어떤 의미에서 유럽에서는 전쟁의 결말이 이미 정해진 셈이었다.
---「5 석탄과 석유로 정복된 바다」중에서
비행기로는 석유, 밀, 동물, 공작기계, 트럭, 자동차, 가사 도구 등을 실어나를 수 없었고, 철로나 도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제한된 지역에서만 운송이 가능했다. … 오직 바다를 통해서만 이러한 화물을 운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할 것인가? 태평양 해전과 노르망디 상륙에 쓰인 수많은 미국 군함들이 상선으로 개조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 배들은 벌크선이어서 포장하거나 정렬하지 않아도 되는 화물만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를 옮길 경우, 부품으로 해체해서 운송한 뒤 배송 지역의 해당 공장에서 다시 조립해야 했다. 또한 항구들이 무척이나 복잡한 탓에 무역이 제한되기도 했다. 부두는 늘 수천 명의 하역 인부들로 붐볐고, 물류 창고는 혼돈에 가까울 정도로 무질서했으며, 어마어마한 교통 체증으로 트럭들은 느릿느릿 움직여야 했다.
이처럼 적절한 운송 수단 및 물류 수단이 결여된 탓에 1940년대 말에는 세계의 총수요 증가가 주춤하기에 이르렀다. 서방에는 강력한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 이 모든 상황이 매우 간단한 혁신 덕분에 곧 바뀌게 된다. 이제 부서지기 쉬운 화물조차 대량으로 배에 싣고, 날씨에 상관없이 매우 안전한 상태로 장거리 해상 경로를 통해 운송하고, 보관 및 취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컨테이너가 등장한 것이다. 컨테이너는 얼핏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소위 ‘영광의 30년’〔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석유 파동 직전까지의 고도 성장기〕 동안 엄청난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혁신을 일으켰다.
---「6 ‘컨테이너’ 혹은 바다의 세계화」중에서
바다가 요구하는 자질들은 겉으로 보기엔 서로 모순적이다. 바다는 체계적인 방법과 과감한 시도, 숙련과 임기응변, 협력과 자율을 동시에 요구한다. 사실 이러한 자질들은 정확히 개인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는 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자유의 이데올로기는 무정부주의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 명확한 제도적 틀 안에 새겨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바다는 가장 나쁜 형태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수많은 선주들이 수많은 선원들을 착취한다. 마치 현실이 되기 전의 자유란 그저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려는 것만 같다. 바다는 생명을 낳았다. 그리고 5억 년이 지난 뒤, 바다는 자신의 피조물 중 하나에게 스스로 자유로이 생각하는 능력을 주었다.
---「8 바다,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의 근원」중에서
냉전은 6년 뒤인 1962년 10월 중순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번에도 그 배경은 바다였다. 1959년 공산국가가 된 쿠바를 향해 소련에서 핵미사일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다. 핵미사일이 쿠바에 도착해 설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그해 10월 24일에 쿠바를 봉쇄했다. 이로써 냉전의 긴장이 극에 달했다. 핵전쟁이 임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쿠바 봉쇄 이후 사흘 뒤 소련이 양보하면서 핵미사일을 실은 배들이 회항했다. 미국은 그에 대한 대가로 터키에 핵미사일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10 미래: 바다의 지정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