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오색의 꼬리 깃털을 길게 늘어뜨린 화려하고 고상한 자태의 봉황 형상은 이미 당대의 장식미술에서 확인된다. 봉황이 지닌 신비한 서수 이미지와 태평성세의 정치적 이미지, 그리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봉황의 길상적인 도안은 한국과 일본에서도 궁중뿐 아니라 민간에 이르기까지 회화, 조각, 공예, 자수 등 다양한 장르의 조형예술품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의 공유된 문화 코드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p.17, 「1장 동아시아 유교사회의 이상적 이미지, 봉황」 중에서
조선에서는 노기와 살기등등한 맹호로서 호랑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대인군자를 은유하는 자애롭고 해학적인 표현이 선호되었다. 또한 부적처럼 벽사기복적 효용을 기대하게 하는 강렬한 패턴의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진 민화로 발전되어왔다. 특히 민화 까치호랑이 그림은 급속한 산업화를 겪었던 1960~1970년대 한국에서 의미와 가치가 재인식되어 그 용어가 창안되었으며, 한국적 전통 미의식의 또 하나의 원천으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p.107, 「3장 까치호랑이의 기원과 출산호작도」 중에서
호생관 최북(1712~?)은 조선 후기 영ㆍ정조대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문인화가들과 달리 사대부 출신도 아니고 도화서 화원 가문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가계나 생애를 알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중략)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렀다는 일화는 최북의 대표적인 기행으로, 그 때문에 오늘날 ‘조선의 반 고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략) 당대 최고의 직업화가였던 최북은 산수화에 능해 ‘최산수’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동시에 ‘최메추라’라 불릴 정도로 화조영모화에도 뛰어나 다양한 화목(?目)을 능히 구사했다.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중 화조영모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상당수 작품에서 가까이 교유하였던 심사정과 강세황의 영향관계가 드러나 주목된다.
--- p.112~113, 「4장 호생관 최북의 화조영모화」 중에서
사진은 엽서, 딱지본 등과 함께 근대 한국 화단의 다양한 양상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시각자료로서 중요하다. 필자도 관복 차림의 남성이 홍세섭의 〈영모도〉 10폭 병풍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없었다면, 그의 영모화풍의 연원이나 작품의 상징적 의미를 밝히는 연구를 시작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결정적 단서가 된 사진 속에는 대청마루 앞 돌계단에 펼쳐진 홍세섭의 〈영모도〉 10폭 병풍을 배경으로 한 남성이 두 손을 모은 채 어색한 포즈로 앉아 있다. 이 남성은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1816~1884)으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이다. 사진은 1884년 조선을 방문했던 미국인 퍼시벌 로웰(1855~1916)이 촬영한 것이다.
--- p.142, 「5장 사대부화가 홍세섭의 영모화」 중에서
무호 이한복(1897~1944)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화가로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안고 등단했다. (중략) 그는 등단 초부터 엉겅퀴 같은 초화류와 학, 오리 같은 동물화를 그려 근대기 화조동물화 분야의 유행을 선도한 인물이었다. (중략)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불과 20대 후반에 ‘동양화단의 거두’로 주목받았던 젊은 화가가 한편으로는 ‘일본화 베끼기’ 화가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던 점이다. 그의 20여 년간의 화단 활동은 근대 화단의 변모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다. (중략) 완숙기로 보기에는 이른 감이 있는 47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한복의 화조화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살펴봄으로써 일제강점기 근대 화단의 특수한 시대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다.
--- p.166~167, 「6장 화조화가 이한복의 화단 등정기」 중에서
모란은 왕권을 상징할 뿐 아니라 공명, 미인, 부귀, 군자의 벗 등 길상적 상징성을 띤 소재로서, 조선시대까지 시서화 일치의 풍토 속에서 의례용 병풍, 화조화, 책가도, 기명절지도, 사군자류 등 다양한 형태로 그려졌다. 그러나 조선미술전람회가 개최되면서 모란화는 사군자, 동양화, 서양화로 재편성되었다. 이는 조선 미술의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일본이 조선미술전람회의 제도 규정을 통해 전통의 서화를 새로운 시스템, 즉 동양화, 서양화, 서·사군자로 구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미술전람회의 분화된 모든 장르에 나타나는 모란은 제도적 규정에 따라 변화하는 근대기 회화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소재이다.
--- p.227~228, 「7장 모란화와 조선미술전람회」 중에서
요대의 화훼도는 선화요묘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꽃 한 송이의 미를 부각하였는데, 무덤 안을 꽃의 천국으로 만드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선화 지역에서는 이 밖에도 넝쿨식, 병풍식, 그리고 화병 등 화훼도의 주요한 양식이 모두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은 아마도 당대에 유행했던, 꽃을 한 송이씩 그려 석곽을 장식하던 방식이나 공예품에 보이는 넝쿨식 표현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 거란족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이러한 당의 전통이 발견되는 것은 아마도 요에서 일하던 한족 출신의 화가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라 짐작된다.
--- p.292, 「9장 꽃으로 장식된 중국의 벽화」 중에서
현재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소릉육준도〉는 금대(金代)의 희소한 회화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1220년이라는 분명한 하한 연대를 지니고 있는 회화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중략) 〈소릉육준도〉의 경우, 유명한 당 태종의 무덤 소릉(昭陵)에 있는 부조 〈소릉육준(昭陵六駿)〉(637~649)을 토대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 p.294, 「10장 금나라의 동물초상화 〈소릉육준도〉」 중에서
서양에서의 자연과학을 중국에서는 일찍이 박물학이라 일컬었다. (중략) 박물학이 점차로 학문적 외형을 갖추게 되면서 다양한 박물학 서적과 잡지가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광주에서는 1860년까지 42종의 서적이 출판되었는데, 이 중 과학서적이 13종이었다. (중략) 오기준은 중국 근대의 대표적 식물학자이자 광물학자로서, 그가 저술한 『식물명실도고』에는 1,180개에 달하는 다량의 식물 삽도가 실려 있다. 이는 그가 중국 각지를 돌며 식물을 관찰하고 직접 채집하면서 눈으로 본 것을 상세히 묘사한 것이었다.
--- p.428~432, 「14장 중국 꽃 그림과 서양 자연과학의 만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