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독이 든 음식을 먹고 돌아가셨다 합니다.”
그 말을 전한 사람은 건어물 가게 이 씨였다. 그 말에 망연자실 정신을 놓은 듯이 주저앉아 있는데 이 씨가 아주 은밀하게 한마디를 보탰다.
“배정자가 미행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화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어나서는 안 될 풍경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이라던 배정자가 이제는 드러내놓고 나라를 구하려는 사람들을 훼방 놓고 있었다. 이 씨의 은밀한 한마디를 화영은 의심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그조차도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온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니, 조작된 소문일지도 몰라요.”
이 씨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사정이 있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아직 죽었다는 걸 확인한 것도 아니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화영의 단호한 태도에 이 씨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이 씨도 란사 선생이 죽은 걸 본 것이 아니니 소문내서 좋을 게 없었다.
(…) 이 씨가 돌아간 후 화영은 그녀가 남기고 간 노트를 꺼냈다. 꽤 두툼한 서양 노트였다. 화영은 조심스럽게 첫 장을 열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다. 내 생각은 그곳에 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 나는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될지니.
그녀가 그대로 느껴졌다. 화영은 첫 장만 펼쳐보고 곧 노트를 덮었다. 그녀가 화영에게 노트를 맡기고 간 이유가 짐작되자 소름이 돋았다. 화영은 노트를 보자기에 곱게 싸서 반닫이 깊숙이 넣었다. 아직은 그걸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 조작된 소문이길 바랐다.
화영은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 pp.16~17
그러던 어느 날, 화영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학교에 괴짜가 하나 들어올 모양이야. 교칙을 무시하고 입학을 허락했대.”
점순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싫어 실비아로 이름을 고친 여자가 말했다. 이즈음 이화학당의 교칙이 많이 달라진 것은 화영도 익히 알고 있었다.
“교칙을 무시하고”
“응. 그 여자 배포가 대단해.”
“무슨 배포”
“기혼자는 못 들어온다 하니까 기발한 발상을 해서 입학이 허가되었다지.”
“기발한 발상이라니”
“어느 날 그녀가 밤중에 프라이 선생님 앞에 나타났대. 가지고 온 등불을 선생님 앞에서 끄면서 말했다는 거야. 우리가 캄캄하기가 이 꺼진 등불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줄 수 없겠느냐고. 그래서 그를 기특하게 여긴 선생님 덕에 입학 허가를 받았대.”
“오호, 그런 용기 있는 여자도 있네.”
화영은 그 여자가 궁금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학교에 온 첫날,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다. 화영은 단박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 도둑을 잡아준 여인이, 본처의 패악을 잠재워준 여인이 바로 그녀였다. 반가웠다. 그녀도 화영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만나다니 반가워요.”
먼저 손을 내민 건 그녀였다. 화영은 잠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공부할 마음이 있는 줄 알았으면 화영이 권유했어도 좋을 일이었다.
“정말 반가워요.”
화영은 그녀의 손을 오래 잡고 있었다.
--- pp.38~39
“이 땅의 여인들을 사랑하오. 배우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한 여인들을 사랑하오. 난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소.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하오. 여자도 남자 못지않은 심지와 결단력이 있소.”
란사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의친왕의 눈빛엔 깊은 신뢰가 그득했다. 의친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그 모든 일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 일을 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에도 자긍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 앞에서는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생각됐다. 힘없고 배우지 못한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펼쳐나가리란 당당한 포부도 사동궁 전하 앞에서는 더없이 작은 일이었다. 이강은 란사의 그런 용기를 깊이 신뢰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스더조차도 전하 앞에서 그토록 오만하던 란사가 그런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여성 교육에 대한 열망은 그 누구보다 깊고 열정적이었다.
“놀랍소. 어찌 그런 생각을 하였소”
그가 술잔을 든 채 하란사를 그윽하게 바라봤다.
“그는 일본의 앞잡이입니다. 일본에 빌붙어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회(YMCA) 회장, 조선체육회 회장, 중추원 고문에 연희전문학교 교장 감투까지 쓴 인물이 아닙니까. 누군가는 호되게 반박을 해야 합니다.”
“음…….”
그가 짧은 신음을 뱉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바람이 부는지 창호지 문이 몇 번 덜컹거렸다. 문짝이 헐거운 것 같았다. 덜커덩거리는 그 소리가 빈 공간을 몇 번 헤집었다.
--- pp.175~176
란사가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아 뒤를 이어 「독립선언서」를 외웠다. 란사가 문장을 외우는 동안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서 들었다. 그러다 란사가 외우기를 멈추면 눈을 뜨고 그다음을 이었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받은 지 10년이 지났다…….”
그러고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또 술 한 잔을 마셨다. 안주도 없이. 술잔을 잡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없이 그가 술잔을 내밀었다. 란사도 말없이 잔을 받아들었다.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술이 독약만큼이나 썼다. 술 한 잔 마시고 한 문장 외우고, 또 한 잔 마시고 한 문장 외우기를 여러 번. 그의 눈에서는 피눈물 같은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추모이며 한 나라의 황제였던 고종에 대한 조문이며 구렁텅이에서 나라를 구해보려는 민초들의 열망이었다. 그들은 벌써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되뇌고 있었다.
“3·1 독립선언서는 대한의 자존이다. 조선을 세운 지 4,252년,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이 하고 정당하게 하라.”
초옥의 나무들이 떨었다. 술에 담긴 하늘도 시퍼렇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그는 오로지 술을 마셨다. 입을 다물고 눈을 닫고 귀를 닫고, 마음엔 아무것도 담지 않았다. 아니 담을 수가 없으리라. 가끔 입을 열어 하는 말은 ‘이보게’가 다였다. 그러다 술에 갇히면 맥없이 쓰러졌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팔다리 다 잘린 허깨비, 그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땅속으로 사라질 수만 있다면, 흔적 없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는 그러고 싶을 것이다. 란사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곁에서 함께 술을 나눈 친구 하란사가 있었다.
--- pp.233~234
형무소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함성이 들렸다.
“대한 독립 만세! 우리는 개구리다!”
그들이 소리치는 말의 의미를 화영은 알고 있었다. 좁은 방에, 앉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수형자들을 집어넣고 육체적으로 쉴 수 없도록 고문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그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가 악물렸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도는 말 그대로 기도일 뿐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위로할 수 없었고 힘이 되어줄 수도 없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순이를 만나는 일이 최우선이다. 만난 후에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이었다. 순이가 갇힌 옥사는 여옥사 8호 감방이라 했다. 햇볕도 들지 않는 축축하고 어두운 옥사에 갇힌 순이를 생각하니 가슴을 돌로 내려친 듯 아팠다.
유관순,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 김향화, 임명애……. 유관순과 향화를 빼고는 모르는 인물들이었으나 만나보나마나 그들의 눈빛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기도가 끝난 후 돌아서 나올 때, 한 서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진흙색 일복 입고 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느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노랫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사나운 표정을 한 간수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손에는 곤봉을 든 채였다. 보지 않아도 그 후의 풍경은 처참할 것이었다. ‘대한이 살았다’라는 구절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 pp.285~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