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에펠탑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쌓고 만전을 기했지만 1940년 5월, 독일은 개전開戰 6주 만에 파리를 함락한다. 1940년 6월 22일 히틀러는 프랑스와 휴전협정을 맺은 후 파리를 방문해 파리의 오페라하우스, 에투알개선문, 앵발리드, 에펠탑을 둘러보았다. 히틀러는 에펠탑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승강기의 케이블을 끊어놔 계단으로 올라가야 해서 포기하고 만다. 이를 두고 “히틀러가 프랑스는 정복했으나 에펠탑은 정복하지 못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진다. 독일군은 탑 꼭대기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서 나치즘Nazism을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갈고리 십자가’라는 뜻)를 내걸었고, 깃발은 4년 가까이 에펠탑에 걸렸다.
--- p.20~21, 「에펠탑 - 히틀러도 정복하지 못한 파리의 상징」중에서
마지노선은 전투 공간뿐만 아니라 대규모 병력이 상주해 생활할 수 있도록 통신, 에어컨 등의 전기 장비를 갖추었다. 또 지하 통로와 레일을 통해 이동할 수 있도록 연결했으며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탄약 운반 리프트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강철과 콘크리트로 지은 보루의 가장 얇은 벽두께도 3.5미터나 될 정도로, 이 요새는 독일 대포의 420밀리미터 포탄을 한 번, 300밀리미터 포탄을 여러 번 정통으로 맞아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당시 최대의 거포巨砲라 불리는 구스타프나 칼 자주 박격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마지노선을 뚫으려는 독일의 노력이기도 했다. 당시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을 주저하던 이유도 마지노선 때문이었다. 천문학적인 비용과 10년에 가까운 건설 기간을 고려한다면 마지노선은 분명 프랑스에 든든한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그렇게 마지노선은 프랑스 국민에게 ‘난공불락’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 p.84~86, 「마지노선 - 슬픈 역사가 된 유럽의 만리장성」중에서
종전 후 1956년엔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를 다시 짓기로 하고 공모전을 진행했다. 그 결과 독일의 유명 건축가 에곤 아이어만Egon Eiermann, 1904~1970의 설계가 채택된다. 그는 붕괴 위험을 안은 종탑을 허물고 새로 짓는 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종탑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를 수용해 베를린에서는 평화와 화합의 상징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의미로 교회를 보수하지 않고 원래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중략)
현재 베를린 사람들은 교회를 간단하게 ‘KWGKaiser-Wilhelm-Gedachtniskirche’라고 하거나 생긴 모양을 빗댄 애칭인 ‘깨진 이’ 또는 ‘썩은 이’로 부르기도 한다. ‘기념교회’를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Gedachtniskirche(게데히트니스키르헤)’에서 ‘Gedachtnis(게데히트니스)’의 의미는 ‘기억’이다. 오늘날 기념교회가 기억하는 대상은 빌헬름 1세가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기억하는 것이다.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입은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평화의 경고비’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 p.109~111,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 수도 한복판에 우뚝 솟은 지붕 없는 교회」중에서
이 시기에 미국 대통령들은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펼친 연설에서 자유주의를 강조하며 평화의 문을 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실상 동독의 배후라고 할 수 있었던 소련을 겨냥하려는 의도였다. 1963년 6월 미국의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문 근처를 방문했다. 케네디는 이곳에서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명연설로 독일인들에게 용기와 희망, 자긍심을 심어준다. 이때 소련은 감추고 싶은 비밀이라도 있었는지 케네디가 브란덴부르크문과 동독 쪽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려고 대형 현수막으로 가려 방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 1987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대통령이 브란덴부르크문을 방문해 당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yev 서기장에게 베를린장벽의 철거를 제안하며 〈이 장벽을 허무시오Tear down this wall〉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고르바초프 총서기장님, 당신이 평화를 간구한다면, 당신이 소련과 동유럽에 번영을 간구한다면, 당신이 자유화를 간구한다면, 여기 이 성문으로 오시오. 고르바초프 씨, 이 성문을 열어젖히시오. 고르바초프 씨, 이 장벽을 무너뜨리시오.”
--- p.130~131, 「브란덴부르크문 - 격동의 현대사를 말없이 증언하다」중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은 소련군이 진주한 동독과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서독으로 분할 통치되면서 1949년 분단된다. 드레스덴은 동독의 영토가 되고, 동독 정부는 폐허가 된 교회를 방치해 연합군의 만행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용했다. 동독 정부는 교회 터를 밀어버리고 주차장으로 쓰려고 했지만, 드레스덴 시민들이 완강하게 항의해 이를 철회했다. 드레스덴 시민들은 폐허가 된 교회에서 잔해를 골라내 재건의 희망과 의지를 새기듯 번호를 매겨 보관하면서 언젠가 성모교회가 재건되는 날을 준비했다. (중략)
교회의 재건은 건축가 에버하르트 부르거Eberhard Burger가 맡았다. 그는 초기의 설계도를 토대로 옛 모습을 기억하는 시민들이 제공한 자료를 모아 교회의 원형을 되살리고, 잔해에서 수습한 검게 그을린 돌 3,800여 개를 새 돌과 함께 쌓아 올렸다. 완성된 건물에서 보이는 검은 돌들이 바로 시민들이 폐허에서 건져내 보관해온 돌들이다. 시민들은 “저 폐허의 성모교회는 파시즘의 야만성과 전쟁의 비극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이다. 우리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 p.153~154, 「드레스덴 성모교회 - 부서진 벽돌로 되찾은 귀중한 유산」중에서
우리에게 일명 ‘빼빼로데이’로 잘 알려진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이다. 우리에게 ‘현충일’이 있듯이 영국과 캐나다, 프랑스, 미국 등에서는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부터 전쟁 중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며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기념한다. 20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해 영국연방 참전 사망자 수인 양귀비꽃 88만여 송이를 런던탑 남문에 장식하기도 했다. 런던탑뿐만 아니라 영국인들의 옷에서도 양귀비꽃을 찾아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전투에서 전우를 잃은 군인들이 양귀비꽃을 꺾어 시신 위에 올려놓으며 넋을 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국인들은 그날을 기억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 p.168, 「런던탑 - 매년 빨간 양귀비꽃으로 장식되다」중에서
티투스의 뒤를 이은 동생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51~96 황제는 콜로세움의 맨 위층인 4층을 추가로 올리고, 야간경기를 도입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더했다. 현존하는 콜로세움의 모습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비로소 완성됐는데, 이 시기에 콜로세움 경기장 내부에 물을 채우고 배를 띄워 모의 해전인 ‘나우마키아Naumachia’를 실시했다는 고대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됐고,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모의 해전은 경기장의 무대와 기둥들을 치웠다가 다시 설치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고 밝혀진다. 하지만 경기장에 물이 새지 않도록 하고 배가 어떻게 원형경기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등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 p.237, 「콜로세움 - 생명이 여가의 수단이 된 투기의 장」중에서
오늘날 콜로세움은 원래 건물의 3분의 1도 남지 않은 채 뼈만 앙상한 모습이다. 전쟁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만들고 죄수들에겐 잔인한 사형장이었던 콜로세움은 1999년부터 사형제도의 폐지를 외치는 국제적인 캠페인의 상징물로 자리 잡는다. 로마시는 각국에서 사형제도가 유예되거나 폐지될 때마다 콜로세움을 비추는 야간 조명을 바꿔서 사형제도 폐지를 옹호하고 있다. 이렇게 수천 년 동안 죽음의 공간이었던 콜로세움은 오늘날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건축물로 거듭났다.
--- p.240, 「콜로세움 - 생명이 여가의 수단이 된 투기의 장」중에서
티투스개선문은 2,000년 가까이 이어진 로마제국의 영광과 유대인의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건축물이다. 예루살렘성전 파괴로 유대인들은 고향을 떠나 세계로 떠도는 ‘디아스포라Diaspora’를 2,000년 가까이 한다. 티투스개선문으로 전쟁사에 뚜렷이 남은 티투스 황제의 예루살렘성전 파괴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20세기 히틀러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도 일어날 리 없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기에 오늘날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며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있는 중동의 평화를 바랄 뿐이다.
--- p.259, 「티투스개선문 - 로마인에게는 기쁨, 유대인에게는 아픔」중에서
크렘린궁전 안에 있는 대통령 관저 건너편에는 1586년에 청동 주물 장인 안드레이 초코프Andrei Chokhov, 1545?~1629가 만들었다는 황제의 청동 대포가 있다. 대포는 길이 5.34미터, 구경 890밀리미터, 외경 1,200밀리미터, 무게는 40톤이다. 게다가 포탄의 지름은 105센티미터고 무게만 1톤에 달해 실로 거대하다. 하지만 이 대포는 러시아의 기술력과 부를 보여주기 위해 일종의 과시용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실제로 전투에서 발사한 적은 없다. 또 나폴레옹이 침공할 당시 모스크바 방어전이 유일한 실전 기회였지만 이때도 발사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
--- p.292~293, 「크렘린궁전 - 800여 년을 함께한 러시아의 붉은 심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