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구연(口演)은 필수다. 펄떡펄떡 뛰어다니는 문장들을 발음해 보는 것, 호흡을 따라 소리로 짚어 내는 작업은 시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글에 갖추어야 할 미덕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출력할 것, 화면에서 탈출시킨 원고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내어 읽을 것, 그리고 조용히 연기자가 될 것, 다시 읽을 것, 소리 내서 다시 읽을 것, 큰소리로 읽어도 좋고,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여도 좋다. 그러나 시를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시인들이 시집을 출간하기 전에 내가 했던 이 읽기의 방식으로 자기 원고를 퇴고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리듬은 규칙적인 휴지나 문장의 분절이 아니라, 강세(accent)의 실현이자 그 어울림이며, 통사의 조직과 흐름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궁리하게 하는 지표로써, 결국 시의 특수성을 추적하고 말의 쓰임과 그 특성을 살피는 데 소용된다. 리듬은 율격이나 정형률과는 상관없다. 우리말의 리듬을 살피려면 무엇보다도 우리가 쓰고 있는 바로 그 말의 성질과 특성, 조직에 대한 일관되고 검증된 지식과 이 지식을 활용한 분석이 요구된다. 이 모든 것에서 선행 조건은, 의미가 텍스트에서 제자리를 찾아 나서는 시의 특수성이다. 시가 소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가 구술성과 리듬의 산물이라는 사실과도 관련된다. 소리 내어 읽을 때 찾아왔다가 허공에 흩어지는 의미의 자잘한 살결들을 붙잡고 우리는 삶의 기이한 골목을 방문한다. 시의 리듬은 이런 점에서 형식의 반대로서의 의미나 내용으로 요약되지 않는 언어의 현상이며, 이것을 나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만 존재하는 구술성의 세계라고 부른다. 현대시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바로 리듬과 구술성일 수 있다.
--- pp.16-17
시는 말을 다급하게 말아 쥐고 속절없이 무너질 때 빛난다. 말의 힘을 부리는 능력에서 한발 양보하면 시는 그것으로 끝이다. 꽃피울 수 없는 바위 위에서 전개하는 이 싸움은, 결구를 예견할 수 없으며, 삶을 정화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우리를 빈손으로 살게 하지 않는다. 난해하다고 알려져 푸대접을 받았던 시의 낱말들을 헤아리고, 문장의 조직과 움직임을 움켜쥐려 몇 시간 골몰히 파다 보면, 결국 시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나, 비평가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 이상한 환희가 행간에서 솟아오른다. 길은 항상 막다른 골목에서 열린다.
--- p.23
게으름, 권태, 소요, 우울, 유보, 지리멸렬, 하염없음, 망가짐, 덧없음, 공허, 어이없음, 잠, 몰락, 잉여, 찌꺼기, 부스럼, 우유부단, 무기력, 포기, 절망, 익명 같은 주제로 써 내려간 글이 나는 무작정 좋았다.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어렸을 때부터, 내가 가져서는 안 된다고 나에게 말해 왔던 것들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구박하고, 지워 내고, 핍박하고, 급기야 깨끗이 청소해서 추방하거나 흔적마저 지우려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 없이 삶을 살아갈 수는 있는 걸까? 도대체 우리는 이것들 없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며, 이것들 없이 어떻게 이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일까?
--- p.59
어쩌다 절연(絶緣)이라는 말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여하튼 의미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고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세계에, 이 세계에, 지금 여기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번역하는’ 문장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해석이나 이해가 아니다. 뭔가를 세세히 풀어서 수용하거나 이해한다고 믿는 만큼 이해하는 행위는 나를 걸지 않고 바라보는 타자를 만들어 낸다. 이해나 해석은 동등성을 전제할 수 없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전개해 나갈 수밖에 없는 가증스러운 게임이며, 상대방의 목을 내리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이상한 숨바꼭질이다. 이에 비해, 동등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환율과도 같은 법칙에 의해 서로가 서로에게 내기를 걸 수밖에 없는 난해한 사투가 번역이다. 팔짱을 끼고 저만치 떨어져 이해한다는 식의 얼굴이 흘리는 비열한 웃음이 아니라, 뭔가 얻으려면 나도 뭔가 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번역이다. 밖으로 나가 봐라!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번역한다. 가로수가, 건물이, 매섭게 부는 바람이, 행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쉴 새 없이 번역한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다. 대신 나는 번역한다, 그리하여 존재한다. 이렇게 번역은 절연의 연습이자 포기할 수 없는 의미의 마지막 자락이다. 시는 가장 정직한 번역이다. 시는 삶을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말들이 아니라 번역하는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 p.69
시인은 매 순간 망설이고 동요하며 공포에 젖어 모순되어 보이는 말을 내뱉는 자이다. 그에게는 기댈 만한 사람이 달리 없다. 그는 자신의 불안이나 혼란,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까닭 없이 찾아오는 고통을 제 언어의 무대 위에 과감히 올리는 사람이다. 시인은 자기 삶의 모순과 씁쓸한 제 꿈이 반사되어 튕겨 나오는 거울 놀이에 한층 고무된 사람인 듯해도 이제 막 생겨난 상처 때문에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언어의 뭉치를 한껏 들어 올릴 때조차 독자에게 참여나 동정을 요구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시인이 추억의 침대 위에서 무언가를 부둥켜안으며 삶의 패배와 배덕을 확인할 때, 그들이 삶의 수많은 거짓말을 제 입술로 포개며 활활 불태울 때, 비평가가 움켜쥘 수 있는 배반의 비극은 어떻게 시가 던진 이 파멸의 유혹을 견딜 수 있는 걸까? 열정 가득한 시가 상기하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최소한 자문할 수 있다. 삶의 다면과 예술적 진실에 투신한 언어가 성찰하게 부추기고 나아가 꿈꾸게 해 주는 몸짓이라고 말이다. 시의 한계뿐 아니라 불가능성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의식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 p.95
번역에 관한 글을 쓸 때, 이상하게도 잡념이 줄어든다. 다시 말해서 가장 수월하다는 것인데, 나는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모국어와 번역’이라는 주제로 서울여대에서 했던 특강의 요지는 근대 한국어가 상당 부분 번역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이었다. 입말과 글말의 일치(言文一致)에 번역이 개입하고 주도한 과정을 최남선의 자료를 중심으로 설명하다 보니, 자연스레 에도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 이르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본어의 변모도 함께 다루게 되었다. 한참 강의에 열중하다 청중들을 보고 문득 깨닫게 된 것은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국어라는 실체를 그 자체로 존속해 온 것처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의 후 받게 된 여러 질문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 “한국어는 크레올(creole)이었던 것인가요?” 그렇다. 모든 언어가, 우리가 모국어라고 부르는 각국의 언어가 사실 ‘크레올’이었다. 진리처럼 존재하는, 그 근본의 증명이 가능한, 항구적인 실체를 전제하는 모국어는 없다. 모두가, 형성 중인, 그 과정 자체로 존재하는, 오로지 작동만을 그 기원으로 삼는 모국어만이 있다. 문법적 실체로, 항구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모국어가 존재할 거라는 가정은, 언어의 기본적인 성질, 가령 ‘자의성’이나 ‘현재성’, ‘공시성’이나 ‘생성성’을 이해하지 못한 근본주의적 발로일 뿐이다. 번역 역시 항상 근사치로만 존재할 뿐이다. 번역의 이러한 친화성이 바로 언어의 변화와 갱신을 부추긴다. 번역은 활동적인 상태의 말을 지금-여기에 결부시킨다. 번역은 진리를 옮겨 오는 게 아니라, 근사치의 값을 생성해 낸다.
--- pp.124-125
개인 안에도 항상 공동체적인 것이 살아 있다. 이 공동체적인 것이 개인을 주체로 전환하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사건이라 부르는 것들을 통해 공동체적인 것은 개인을 정체성의 속박에서 풀려나오게 해 타자를 대면하게 하는 동시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게 하면서 끊임없는 자기반성의 시간을 자아에 ‘결부’시키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공동체적인 것 속에서 공동체적인 것을 살아 낸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건, 어떤 시간에서건, 어떤 방식으로건, 개인/사회, 자아/타자, 소수/다수, 여성/남성의 이분법 속에서 주로 후자가 전자에게 가하는 폭력에 맞선다는 것을 말한다. 공동체적인 것을 사유한다는 것은 파시스트적 행위들에 대항한다는 것이며, 대항의 방식을 고안한다는 것이며, 어떤 형태로건, 어떤 방식으로건, 그런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들어도, 외면하고 싶어도, 벗어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달으며 지낼 수밖에 없는 저 불가항력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 p.202
한국 시 연구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두 가지 개념은 단연코 ‘리듬’과 ‘주체’다. 헛소리의 생생한 현장과 교묘한 짜깁기의 기묘한 광경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논문들과 글들이 차고 넘친다. 마구잡이로 철학이 끼어들어 논의를 산으로 끌고 가고, 역사와 맥락을 착각하여 선문답을 주고받으며 이해했다는 환상을 부여하고, 타인의 글을 정작 자신은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점유하고(인용은 자주 생략된다) 전유하려는(자기 것으로 둔갑한다) 욕망이 무분별하고 과도한 글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언어 이론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이 두 개념에 관한 연구는 주로 언어 이론이 제거된 상태에서, 혹은 언어 이론을 기호학이나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착각한 상태에서, 고작 몇몇 유명한(유명했던), 그러나 지금은 낡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몇몇 글을, 그것조차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유명한 몇몇 대목들을, 원문이 아니라, 타인이 인용한 것을 다시 인용한 것이 분명한데도, 자신이 마치 처음 인용하는 것처럼 교묘하게 둔갑시켜 알리바이처럼 제시할 뿐이다. ‘리듬’에 관한 연구는 오히려 1930년대의 글들이 지금보다 수준이 더 높고 정확한 논리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주체’에 관한 연구는 문학 외의 영역(철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논리학 등)에서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문학은 이러한 시도 중, 정신분석학이나 사회학, 철학‘들’의 논리를 끌어들여 문제 전반을 해결하려 시도하며, 또한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언어 이론을 제거하는 동시에 언어 이론에 타격을 가하며, 문학을 언어 밖, 저 어디론가 이동시킨다.
--- pp.334-335
새로운 번역을 ‘선전’할 때, ‘정본(定本)’이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고전의 ‘이본(異本)’을 비교 검토하여 표준이 될 만한 판본을 선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번역본이 ‘정본이다’와 같은 주장은 맥락에 따라 앞선 번역의 가치를 강하게 부정하는 표현이자 앞선 번역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말이 되기도 한다. 새로운 번역이 늘 ‘정본’은 아니다. ‘정본’이라는 말 자체에 벌써 엄청난 권위적 태도와 교묘한 선전술이 모두 담겨 있다. 정본이라는 주장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정치적 올바름’, 가령, 명백히 잘못된 번역을 두고서도, 당신은 이렇게 번역했지만, 나는 이렇게 번역한다, 식의 접근법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한편 일본에서 가장 선호되는 번역에 대한 이 비평 방식. 그러니까 ‘번역적 올바름’이 그럼에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을 밟고 올라서려는 번역은 선동적이기 쉬우며, 간혹 엉터리일 경우도 많다. 특히 타인이 이미 이루어 놓은 번역을 토대로 감행한 번역, 그러면서 앞선 번역을 비판하는 번역은, 이 비판의 대상을 유일하게 자기 번역의 터전으로 삼은 게 명백함에도, 마케팅이나 선동은, 앞선 번역을 무(無)로 만드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런 번역은 아직 그 누구도 번역하지 않은 책을 번역하는 법이 절대 없다.
--- p.345
‘이론가 김현’을 쓰고 있다. 다시 전집을 꺼내 들었다. 전집 외에, 살펴볼 글도 많다. 장르 이론, 구조주의 이론, 수사학, 기호학, 푸코, 바슐라르, 루시앙 골드만, 르네 지라르, 사르트르, 제네바 학파 등등 소위 ‘이론(Theorie)’이, 한국에 수용되어, 거대한 ‘문학론’을 형성하며 속속들이 비평 담론 속으로 흡수되었던 것은 김현 덕분이었다. 이론은 이렇게 자주 국경을 넘는다. 비평과 이론은 이렇게 ‘방언’의 한계를 부수고자 하는 열망을 통해 낯선 곳의 문을 두드린다. 이 방대한 작업을 진행했던 시대를 잠시 떠올려 본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 정도의 고된 작업이었을 것이다. 김현은 비평의 ‘트랜스-횡단’ 작업을 몸소 실천한 유일한 비평가, 유일한 이론가였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론은 없다시피 하다. 마지막에 김현이 붙잡고 있었던 것은 푸코였는데 『시칠리아의 암소』에서 ‘모더니티’에 관해 다루면서 ‘메쇼니크’(김현의 표기에 따르면)의 하버마스와 푸코 비판을 열린 태도로 경청하고 차분히 정리한다. 놀라운 것은 시기에도 있다. 김현은 이론이건 비평이건, 동시대의 흐름 속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그의 번역서나 편저에 1960년대 중반부터 관심을 두고 자료를 모았다는 언급이 꾸준히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장에 관한 이 목마른 표식들은 그가 항상 동시대성 안에서 이론과 비평을 사유하고 실천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시대가 지나기 전에 자기 언어로 번역?편역하여 한국문학의 지평에다가 비끄러매려는 이 태도는 김현이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는 사실, 실로 불가능한 작업을 매일 개진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동시에, 바로 이론-비평의 이 상호-주관성의 지평을 그가 항상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갑자기 가슴에 멍이 드는 것 같다. 한국문학은 김현과 같은 비평가-이론가를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다.
--- pp.358-359
한글날, 빼놓지 않고 반복되는 한글 자랑. 좋다. 우수한 문자. 정말 우수한 표기 체계. 외국의 어느 학자는 이 표기 체계는 변별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전히 라디오에서 유명 인사의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는 말들이 흘러나온다: “한글을 짧고 분명히 쓰면 좋다, 한글을 구사할 때 외국어 섞인 낱말을 가급적 지양하면 좋다, 한글로 표현하는 게 아름답다, 한글의 우수성은 다른 외국어보다 월등하다”처럼, 방금 들은 논평들이 여전히 차고 넘친다. 한글은 ‘코리언’ 알파벳이다. 그러니까 한국어는 키릴문자나 로마자로도 표기할 수 있다. 반대로 한글로 영어나 프랑스어를 표기할 수 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20세기 초, 에도 시대 낡은 일본어에서 벗어날 요량으로 제 일기를 로마자로 표기하여 적은 바 있다. 요지는 한국어와 한글을 혼동하면 곤란하다는 거다. 올해도 또 이런 얘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 pp.386-387
시집 해설을 쓰다가, 혹시 시인의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이후부터 글은 급격히 어려워진다.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뭐든 더 쓰게 되는 경우와 좀처럼 그렇게 하지 못하고 내내 입을 다물고 마는 경우로 나뉜다. 글의 방향이 각각 다른 이 양자. 이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동기는 무엇일까? 물론 여러 기준이 있으리라…. 언젠가 자전과 시, 전기라는 것과 글쓰기, ‘오토 픽션’을 주제로 글을 써 볼 것이다! 할 수도 있었으나 너무 힘들어서 차마 하지 못한 말, 결국에는 다 하고 말리라.
--- p.458
느지막이 일어나 오후가 시작되기 전에 학교에 나왔다. 어느 때보다 조용하다. 아무도 없다. 이 고요는, 이제 익숙하다는 착시를 준다. 그런 것 같다. 관점이 사건을 만든다.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지를 실감한다. 크노가 ‘문체(style)’라고 부른 것, 그러니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도 사실 옥희가 아니었더라면 어머니의 연심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라르 주네트(Genette)는 ‘시점(Point de view)’의 상이한 층위들, 그 각각의 특성이 내러티브 구성의 첫째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현실의 시간과 서사의 시간이 구성되는 방식의 차이를 플롯이라는 개념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객관적인 무엇, 절대적인 본질, 단 하나의 시간, 단 하나의 말과 그 의미를 고정된 무엇처럼 여기면서, 이를 진리 혹은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살펴야 할 것은 진리(verite) 대신 역사성(historicite), 의미(sens) 대신 의미의 값(valeur), 정체(identite) 대신 타자(alterite), 구조(structure) 대신 체계(systeme), 문법(grammaire) 대신 통사(syntaxe), 개인(individu) 대신 주체(sujet)다. 아니다. 전자는 철저히 후자의 산물이다. 후자는 철저히 전자의 ‘생성(devenir)’이자 그 ‘과정( processus)’일 뿐이다.
--- pp.515?516